사변적 존재론과 경제적 존재의 필연성
지금 우린 그러하다 지금 우린 그렇다 내 입으로 내 손짓으로 구차하지만 우린 지금 인간 과잉의 시대에 도달했다 달에 도달한 지 채 60년이 안된 지금 인간의 존재 중 다수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태에 놓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아니지 자각하지 못하라고 모두의 눈을 가린 채 경제적 지표와 성장 논리가 요구하는 목표만을 내면화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마치 역병처럼 COVID-19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라는 종에게 더 높은 생산성과 더 큰 유용함을 강요하면서 강요받고 있다 그 가운데 경제적 체계라는 이제는 인간 종을 넘어선 거대객체는 인간을 끊임없이 쓸모 있는 존재로 정의하라고 인간을 채근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인간을 정의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우스우면서도 단순한 사실은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800년대 이후 산업화에 따라 자동화된 기계와 시스템이 대부분의 노동을 대체하고 인간의 노동력은 점점 필요치 않아졌다 다수의 인간들이 더욱 잉여로 느껴진다 실패자로 낙오된다 부적합 판정을 받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무기력감을 느끼지만 이것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교묘하게 깨닫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무능력감은 개인의 수준에서 집단적인 수준의 심리적 문제로 확대되고 매우 당연하게 미국의 정신의학학회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분류에 포함되어 과학적이고 의학적이고 전문적으로 정신과적 영역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는 병증으로 자리 잡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냥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유한성 이후에서 사실성 개념을 통해 필연성의 허상을 폭로한 퀑탱 메이야수는 우리가 물리적 법칙이나 존재 자체를 필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착각에 불과하며 세계는 본질적으로 비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가 경제적 성장 논리에 기반해 인간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공허한지 또한 보여준다 그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 존재는 유용함이나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될 필요가 절대적으로 없으며 단지 소여 된 상태 그저 있음이라는 그 상태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뇌를 가지고 생각을 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외면한 채 결핍과 성취라는 허구적 이상 속에서 스스로를 평가 절하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적 지표는 여전히 우리가 더 더 더 나아져야 한다고 그럼에 더 더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인간 다수가 이미 경제적 체계란 무대 속에서 필요치 않은 상태에 놓였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우리는 무기력감과 자기부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더 깊은 개체 고립과 자아 파편화를 낳고 결국 우리가 우리라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대다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주 잘 정말 잘 돌아가는 시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그 시대 속 우리는 이러한 소여 된 상태 존재의 본질적 여유로움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경제적 필연성의 증명이란 환상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억지로 만들려 애쓰고 있다 메이야수의 말처럼 우리가 필연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필연적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일까 그렇지 않는다면 필연성만을 자연적 성찰의 결과처럼 선험적 필연성으로 인정해 야하만 하는 것일까 지금의 관성이 지속된다면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점점 더 깊은 결핍의 환영 속 소여 된 상태를 잊고 결핍과 성장의 강박 속에서 더욱 무기력해질 뿐이다 대중이란 그들에게 벌써 퍼져 처치가 어려워진 역병 그 무기력증 말이다 과잉 생산의 병증의 결과가 결국 나란 존재적 결과라니 역겨울 정도로 웃음이 턱하니 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