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여 오 바다여

이별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

by 빙빙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예민하다 내 감정이 불안정하다 그 여자와의 이별 따위 때문에 내가 이렇게 흔들릴 줄 몰랐다 나는 인정하려고 했다 아니 인정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나에게 남은 답안지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여자들 앞에서도 극도의 까칠함을 보일 정도로 지쳐 보였다 아니 지쳐있었다 그리고 이 밤 내 앞에 놓인 헤네시 한 잔을 두고 얇게 슬라이스 된 오이의 표면을 원시 생물을 탐구하듯 쳐다보며 그렇게 느끼고 나에 대한 고찰이라는 깨달음이라는 단어로 나의 상황을 결정하고자 했다 한 면이 검붉은 색 벨벳으로 가려져 마치 뮬랑루주 속에 있는 듯한 곳 한 명이 간신히 오갈 수 있을 정도의 계단을 따라 내려와야만 하는 수고스러움을 마치 땅을 파고 들어가는 한 마리의 두더지가 된 기분으로 따라가야지만 당도하는 피난처 같은 이 공간에서 그녀와 함께했고 결국 그녀를 떠나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공간이 그녀와 공유되고 나의 공간에서 그녀의 공간으로 이전되는 아니 이관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행복했다 음 행복이라 상투적인 표현 밖에 생각이 나지 않다니 행복이라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랄까 아니 이건 또 너무 거대해졌다 오히려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대학교 신입생 과외 선생의 마음이 더 적절할까 모르겠다 그 어딘가인데 기막힌 표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래서 소주를 마시면 안 된다 점심이었나 저녁이었나 그 얹저리에 일어나 나는 막연하게 냉장고 속에 있던 소주병을 부여잡고 창밖을 내다보며 들이켰다 생수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손 마디마디 차가운 유리의 열전도를 느끼며 바라본 밖은 그저 그냥 주말이었다 유모차를 끌며 가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한껏 꾸미고 - 아마 결혼식을 다녀왔나 보다 -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어르신들 양재천가에 집을 얻게 된 것은 그녀의 생각이었다 산이 좋아 산을 좋아해 익숙한 게 좋아 익숙한 것 외에 두려워해 상경 후 처음 정착한 삼성산 자락 학교 다닐 때 근처 원룸에서 지내다 직장을 얻고 나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고시 공부하던 때가 그립다는 핑계를 대며 그 근방에서만 20년을 넘게 보냈다 그럼에도 한달음에 산에 그것도 아무 시간에나 갈 수 있음에 나는 만족했다 가슴이 날뛰고 가슴에 불이 나고 그 열기 광기 그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 나는 미친놈은 될 자신이 없었기에 가쁨 숨을 가슴을 넘치는 숨을 쉬며 뛰어다녔다 열기가 습기로 바뀌어 온몸을 적시고 옷에서 땀을 짜낼 수 있는 순간이 되어서야 한기가 느껴져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 초년생의 나는 그저 일과 산 그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회사에 들어온 인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전 같았다면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싶었겠지만 대리가 되고 나니 동질감 아닌 동질감이 들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인턴은 우리 과 후배이기도 했다 물론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친밀감이 컸다 인턴도 은근히 도움을 바란다고 느꼈다 일머리가 있는 녀석이라 조금만 가르치면 곧잘 따라 하고는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을 잘 준비하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나는 금세 인턴과 친해졌고 우리는 곧잘 퇴근 후 저녁에 반주 삼아 술 한잔 하고는 헤어지곤 했다 평소 깍뜩한 성격의 그는 술이 좀 오르면 항상 대리님 소개팅 시켜 드릴게요,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나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싶고 또 그런 말이 싫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세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복사꽃이 언제 피었나 싶다가 한여름의 태양이 느껴질 때쯤 인턴이 떠날 시기가 되었다 부서 전체가 인턴이 떠남을 아쉬워하며 회식을 진행했다 그날은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가장 많이 마신 날이었다 새벽 4시 인턴과 나를 포함해서 서너 명이 남아 이자까야에서 이야기를 하다 결국 헤어지려는 순간 대리님 아쉬워요 좀 더 마셔요 제가 진짜 진짜 소개팅 시켜드릴게요,라며 나의 옷자락을 잡는 비틀거리는 인턴을 일으켜 간신히 택시를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아파트 현관문에서 우리 집 우리 집이다 헤헤,라는 인턴의 목소리와 오버랩되며 현관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아무 말 없이 아래위로 흝키며 목인사만 하더니 인턴을 데리고 들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그냥 그저 회사 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또한 편한 복장에 집게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안경을 쓴 그녀를 친한 후배의 누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턴기간이 끝났으므로 인턴과의 연결점은 내 인생에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무난하게 과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그 해 나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이란 것을 가게 되었다 사실 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하고자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패키지여행이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국을 벗어난 새로운 공간에서 맞이하는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습도 햇살 건물의 지붕들이 만들어내는 온연히 다른 그 선과 면들 5일째 이른 새벽잠이 오지 않아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다가 마주친 일출에 나는 산을 올라가야지만 심장의 쿵쾅거림을 느껴야지만 풀려나갔던 내 안의 광마가 두들겨 패지 않아도 마치 거대한 바다에 희석되는 강물처럼 스르륵 사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도질하지 않아도 흠씩 두드리지 않아도 나는 고요해질 수 있었다 그저 공간이 달라졌을 뿐인데 같은 시간 같은 행성을 공유하는데도 불구하고 단 몇 시간의 비행으로 나는 완전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정말 달라질 수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길,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관통해 나갔다 그 뒤로 나는 가까운 일본 중국부터 남아프리카까지 일정이 허락하는 한은 최대한 여행을 다녔다 물론 그만큼 나의 고과는 점점 낮아졌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라는 우리에 갇혀서 가축처럼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만큼이나 중요할까 그리고 나는 나란 사람은 그 밖에 있었다 회사를 벗어난 그곳에서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는 그저 나의 여행 경비를 위한 역할 그 이외에는 어떠한 목적성도 나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나를 위한 길을 다니고 다녔다 새로운 곳이 익숙해짐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나는 나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서 우연찮게 만난 프랑스인이 제주도를 가보았냐며 나에게 물었다 아니요,라고 대답한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에서 나는 갑자기 마치 세 살배기 아이가 어미에게 혼나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그는 전혀 그런 의도로 물어보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그저 느꼈다 그걸 무언가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제주도는 여행지로 고려 치도 않았다 나에게 한국에서의 삶이란 회사를 다닌다 딱 그 문장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어쩌다가 내 자서전 같은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나가고 있을까 이게 내 문제다 요즘 나의 문제 아니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움일까 인터넷상에 누군가가 중년들의 특징으로 노래할 때 끝에 음정을 붙인다와 같은 우스갯소리를 적은 걸 본 적이 있는데 어떤 질문이나 생각을 직접 들어내지 않고 에둘러 이야기하거나 혹은 괜한 잡소리로 그득 채운 뒤 상대가 녹다운된 뒤에 스스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는데 그게 바로 내가 되었다 그녀가 떠난 것 또한 내가 이런 변화를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하고 그저 영포티처럼 처연하게 현실과 이상의 간극 거울과 거울 속의 나와 그 너머의 나와 그리고 그 너머의 나와의 영원한 간극을 메꿀 수 없기에 그렇기에 그렇게 떠나지 않을까 그랬을지 모른다 그녀는 나보다 생체적 나이는 어렸어도 그로 인한 물리적 시간적 경험은 적었지만 정신적 질감은 한 수 위였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즐겨마시던 헤네시를 한잔 하다니 정말 우아하지 못하지도 이런 우아하지 못함이 있을까 연체동물처럼 휘휘 말아져 있는 오이 슬라이스를 보니 오이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못하다는 생각이 아니 오이가 나보다 더 신선하고 생생하고 생기 있어 보이기까지 하다 잔 너머에서 다가오는 조명의 아련함에 갑자기 헛기침이 나온다 사장님은 얼음을 더 주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저 소주의 영향이리라 소주 처음처럼, 아스파탐, 페닐알라닌, 모노아민, 글루탐산, GABA 수용체, 연속되어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어들, 그래 아마 평생 인공합성물질을 벗어나지 못한 내 대뇌 속 수용체들의 역설적 상태가 나를 정신적 불안정 속으로 확정시켰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오이보다 못할지도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가 원 주제를 벗어나 통제되지 않는 충동적 상태를 유지한 상태로 광활한 우주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뭔가 통제되어야 한다 그래 음 소주를 들이켜던 그때로 돌아가보자 과거로의 기억을 더듬는 시간 여행은 인간만의 우월한 속성이 아닌가 아닌가 대부분의 모든 동물이 꿈을 꾼다고 하던데 그 말인즉슨 모두가 경험과 기억을 재조합하고 그를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지구의 표면을 사과 깎듯 잘 깎아서 펼쳐 놓고 그 위에 존재하는 존재들 사이를 끈으로 연결해 본다면 얼마나 단단하고 또 강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구잡이로 얽히고설켜서 뜯어내지도 못하겠지 그 속에 그녀와 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저 하릴없이 산책을 하는 노부부와 같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녀에게 표현하지 않은 작은 소망은 혼인 신고서에 서로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작은 소망 정도로 생각하고 내 손바닥 위에 소중하게 올려놓았었는데 그냥 다 사라져 버렸다 헤네시 옆에 누군가가 얹어놓은 사과로 만든 토끼가 눈에 들어왔다 손님 중 한 명이 사과를 한 상자 가져오더니 각 자리마다 이렇게 나누어주고 있다 나는 그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경을 놓고 왔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 볼 뿐이지 그녀에게 그 어떤 이성적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 나는 소주를 반 병 마시고 온 불안하고도 불안한 그리고 예민한 이별한 남자이다 훗 그래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나도 이런 나도 지금의 나도 조금은 괜찮지 않은가 이별을 맞이한 남자라 뭔가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고 강한 빗줄기를 우산 없이 맞는 그런 온몸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라 생각 보다 괜찮지 않은가 인생에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싶었다 그럼에도 다시 원래 나의 생각으로 돌아간다면 너무 예민한 내가 날카로워서 내 스스로가 부담스럽게 아프다 그녀의 빈자리에 이렇게 흔들릴 거라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혼자가 편하던 내가 둘이 편해지고 일상에 익숙함이 그녀가 나란히 있게 되었다니 그리고 어쭙잖게도 나는 그런 상태가 언제고 우리 둘이 백발이 될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막연한 순진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우습지도 않지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던 나의 부모가 황혼이혼이란 트렌드에 올라타 서로에게 안녕을 고했음을 바로 앞에서 목도했음에도 나는 아직 어린 소년처럼 사랑의 순수성을 순수한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게 있으리라고 유니콘이 아니라 지구상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 스스로를 세뇌했다고 해야 하나 내가 나를 가스라이팅했던 것인가 이게 자기 확신의 과정일까 아니면 자기 합리화를 통한 자가당착을 무논리적 관점으로 가져가는 상태였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여기 없다 그렇다 그녀는 없다 사과를 깎아서 만든 토끼 두 마리와 헤네시 한 잔 그리고 연체동물급 오이만 나와 함께하고 있다 갑자기 사과를 손으로 집어서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었다 입에 넣어 한 입 물자 잘 익은 사과의 달큰하며 시큰한 과즙이 입안 가득 들어찬다 퍼석하지 않은 식감 완벽하다 거기에 토끼의 몸에 붙어있던 껍질까지 맛있다 나도 모르게 오,라는 감탄사를 내버렸다 그 사이 바에서 나오던 노래가 다른 노래로 바뀌기 전까지의 적막이 흘렀다 나의 감탄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려 버렸고 사과를 가져온 그 손님이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때요 모든 시름이 없어지는 맛이죠,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랬다 사과 그저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헤네시 한 잔에 우울한 남자의 콘셉트에 맞추어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의 미간의 두 줄이 사라졌다 그때 생각보다 낮은 중저음이 그녀의 입술사이에서 나왔다 남해에서 키운 홍로라서 그래요, 바다에서 키운 사과는 생각보다 매력 있죠, 남해라 남해에서 사과를 키우기도 하는구나 나는 그렇구나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기 있는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는 가실 때 챙겨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다지 취하지 않았음에도 술이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은 나는 바에서 나가며 사과를 두어 알 집어서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그래 바다, 바다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에는 사과가 둥둥 떠 다녀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해안가 근처에서 SUP 보드 위에서 사과를 먹으면 햇살의 따끔한 이글거림이 목구멍까진 따라오지 못하겠지 싶었다 그렇게 이별의 아픔도 내 위장까지 잠식하지는 못하는 완벽한 시공간이지 않을까 한남대교 위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차창 밖 도로 가득 펼쳐지는 가로등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건물들 넘실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이 들어 이별하니까 존나 슬프고 더 아프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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