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내면의 두려움을 바라볼 때

by 빙빙

갑자기 페이스북으로 첫 직장 동료의 댓글이 달렸다고 앱푸시가 왔다 십수 년 전에 그것도 육 개월을 함께 일한 기억 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나에게 어떠한 교점도 만들지 않았는데 굉장한 어색함이 느껴져 폰 바탕화면에 있는 페이스북 앱 아이콘을 바라보며 삭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근데 또 찬찬히 생각해 보니 어색할게 무엇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내가 뭔가 해를 끼친 적도 없고 그분도 나에게 그다지 나쁜 인상은 아니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엄지를 높이 들어 앱을 열었다 우와 애들 많이 컸네요 저 한 달 뒤에 남편을 따라 텍사스 오스틴으로 가요 오스틴에서 한 번 보아요, 생각 보다 별게 없었다 김이 빠졌다 내가 왜 이리 방어적이었나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싱잉볼을 울리며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도 출장 시 사 온 블랭킷을 깔고 놋그릇 장인인 아빠 친구분의 싱잉볼을 가지고 정원이 보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창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리 집 막내 진도믹스인 기니가 내 엉덩이에 자신의 엉덩이를 마주하고 눕는다 싱잉볼을 집어 들어 왼손 바닥 위에 올리고 나무스틱으로 손목 스냅을 이용해 옴, 우주가 울리는 소리의 반향을 만들어낸다 왼손을 살짝 움직여 가며 옴, 그 소리가 더 크게 내 가슴속까지 울리도록, 그리고 깊이 더 깊이 내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활화산의 이글거리는 마그마 속으로 번지점프를 하듯 그렇게 뜨거움에 온 피부가 사라지듯 아프고 강렬하게 내면으로 내려간다 아 그 당시의 나는 말괄량이 아가씨였지 성인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럼에도 성인이라고 생각해 내 생각을 밀어붙히곤 했지 가끔은 아니지 계속적으로 과장을 했지 R시계를 차고 있는 그분에게 꿇리지 않으려고 그 과장 그러니까 거짓말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곤 했지 마치 지역의 유지 딸인척 빵부스러기들을 슬쩍슬쩍 떨어뜨리고 이미테이션을 오리지널인 척하면서 다녔지 뭔가 그분이 등장한 뒤 그분의 모든 오리지널 명품들에 기가 눌리기 싫어서 중국 공장에서 SA급이라는 물건들을 사들였지 이미테이션 같은 인생이었어 잊고 싶은 기억 철부지 없던 시절 심지어 아빠를 엄청난 조각가라고 스스로 포장했지 그 누구도 그닥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야 그리고 아빠는 실제로는 내가 자라나는 동안 조각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을뿐더러 초등학생과 직장인 대상으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왜 그땐 그랬지 그리고 그때의 치기 어린 내가 들통날까 봐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했었고 그런 나를 다 잊고 살던 현재의 나는 그분의 연락에 다시금 그때의 못난 나를 잠시 소환했었었구나 과거의 나 이제는 나 스스로 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그녀 마치 몸을 함께 공유하는 사이처럼 느껴지는 그 자아가 야속하지만 서도 그녀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점이구나 지금이 그런 시기구나 그러지 못하면 그분을 만나는 게 씁쓸할 거야 스트레스를 받을 거야 맞아 그럴 거야 나의 넘쳐오는 두려움은 기실 여기서 시작되었구나 따뜻한 온기가 기니의 엉덩이를 통해 전달된다 그 온기에 나는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고 다시금 작지만 소중한 나의 촛불을 가슴속에 켠다 그 촛불을 나무스틱 대신 오른손에 꽉 잡고 더 깊숙이 들어간다 넘치지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던 학창 시절 그러나 명문대를 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을 어지럽혔고 무리를 해서 가게 된 미국 유학 학비는 물론이거니와 뉴욕의 물가는 부모님이 이십 년 넘게 모아 온 돈을 모두 탕진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부모라면 응당해야 하는 희생이라 생각했다 자식의 앞길을 막지 않고 최대한 여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부모라는 단어의 목적성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MBA를 마치고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설팅펌에 입사하였다 부모님께 내가 미국에서 지원받은 금액을 이년 안에 갚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첫 달 월급을 받고 나니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사인한 연봉과 실질 소득의 차이가 너무 컸을뿐더러 물론 물가의 차이가 있지만 부모님께 렌트비 포함해서 월 천만 원이 넘는 용돈을 받던 나의 경제규모는 매우 커져 있었다 부모님께 돈을 보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서 주말 동안에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궁핍해져 갔다 결국 마통을 뚫고 숨통이 트인 나는 비싼 것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빚은 점점 늘어났다 마통이 그득 차서 더 이상의 대출이 어려운 시점이 되자 나는 결국 중고명품샵에 가서 그 모든 것을 처분했다 그리고 그분이 신입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난 절대적으로 기가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을 나온 그녀에게 무언가 그래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테이션 인생으로 전락했다 전복당했다 그랬다 그때의 나는 그랬지 촛불이 마구 흔들린다 거짓이라는 가짜라는 바람에 흔들린다 왼손의 바닥으로 촛불 앞에 가림막을 만들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했지만 결국 후 하고 촛불은 꺼져버렸다 기니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손을 더듬거리며 동굴에서 나온다 입구가 안 보이는 그 길고 긴 동굴에서 홀로 넘어져 무릎에 생채기가 날지얹정 네 발로 갈지얹정 나간다 옴, 싱잉볼의 울림이 들려온다 입구가 멀지 않았다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사방에 적빛 구슬이 가득 찬다 그리고 저 멀리 아득하게 기니의 짖는 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이 기시감에서 벗어난다 퍼뜩 잠에서 깨어나듯 기니의 우렁찬 짖음으로 나는 현실로 돌아오고 정원 너머 붉고 붉은 화염을 바라본다 산불이다 넘실 거기며 나를 향해 오는 것 같다 나는 빠르게 기니의 허리를 잡고 들쳐 매 픽업트럭에 태우고 집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5분 정도 지나 룸미러로 집을 바라보자 집에 불길이 활활 마치 도깨비가 신나 놀 듯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찔했다 내 안에 그 어떤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를 바라보는 건 부차적이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어찌저찌 나의 삶을 살려냈다 물론 이제 이 이후가 더 큰 악몽같이 힘든 시간이겠지만 난 혼자가 아닐뿐더러 다행스럽게도 시부모님의 댁이 멀진 않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겠지 그럼 첫 회사 동료분은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냥 그렇게 기이하게 회피하고 싶은 문제가 사라졌다 이게 바로 우주가 돕는다는 걸까 집은 무너졌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애들을 픽업하러 간다 얘들아 우리 집 다 탔어,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남편에게 얼른 전화를 해야 할 텐데 휴대폰을 두고 왔네 하하하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그 노래가 갑자기 머릿속에 맴돈다 아, 노래 하나 꽂히면 삼일은 그 노래만 생각나는데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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