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마술을 좋아하시나요?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마술은 당신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마술이 아니다 오히려 연금술을 마술에 포함시키려 한다면 그렇다, 연금술은 시몽동의 마술에 적합하다 물론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럼 내가 생각하는 그 마술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당신이 가진 당신이 축적한 당신의 뇌에서 뱉어내는 그 생각 개념이 타당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설사 틀릴지언정 큰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짚고 가야만 한다 시몽동의 마술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안타깝지만 매우 아니다 뫼비우스띠의 앞뒤를 알아맞히라는 질문이 오히려 단순하게 느껴지듯 반복과 번복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설명에 당신은 이미 지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닌 것은 또 아니다 SAILORR의 앨범 커버 속 그녀가 완연하게 변신한 곤충이 바퀴벌레인 것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장하는 미인도가 천경자 선생님의 그림이 아닌 것처럼 그러함과 아님은 흑과 백처럼 선명하면서도 우리는 늘 그렇게 선명한 높은 해상도로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손가락 없는 아우성 속 팔가지 묶음과 같이 어긋난다 그러하다 그리하여 이 긴 서사가 필요하다 필요했다 시몽동의 마술이 꽤나 객관적인 부분에 집요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가 친절하다는 역설처럼 역동적 축약의 권위를 직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렇다 마술은 그렇다 그의 마술은 세상의 원초적 바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그 시작은 실험 물리학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마술은 객관적 원인이 부여되어야 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질서가 구축된 사건들의 직관적 동일성에서 출발한다 마술적 단계란 종교적 초월적 원인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주객일치를 지향하는 내재성의 단계인 것이다 시몽동의 마술은 자연을 엄격하게 규정된 사건들의 연속으로 파악하고 그 규정의 본질에까지 파고들고자 한다 종교가 아닌 과학적 인식의 첫 단계로서의 마술 그렇다 그게 바로 마술이다 마술 마술 수리수리 마수리 마술 그 마술 말이다 그 수리수리 마수리 마술은 기술과 종교로 분기한다 그리고 각각은 다시 이론과 실천으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분기란 행위는 시계열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며 발산과 함께 수렴을 추구한다 시몽동은 미학적 사유의 불충분함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철학적 과제로 조망한다 그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경유하여 모양-바탕의 관계 속에서 힘을 형태에 귀속시키되 바탕 또한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잠재적 역동성의 장으로 파악한다 기술 테크놀로지는 바로 그 형태적 시스템으로서 존재의 진가를 드러낸다 여기서 바탕과 모양을 흔드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들뢰즈Gilles Deleuze와 셸링Friedrich Schelling을 소환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들뢰즈가 말한 초월론적 우둔함bêtise transcendantale부터 우리는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들뢰즈에게 우둔함은 단순히 무지나 어리석음이 아니었지 그것은 사유를 강제하는 힘이랄까 뭐랄까 그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외부적 충격 주체를 깨뜨리며 바탕을 흔드는 사건이다 이 우둔함은 모양과 바탕을 흔들어 형태가 스스로를 자급자족하는 체계가 아니라 바탕 속 잠재적 역동성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둔함은 결핍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 조건이자 개체화의 필연적 진동이 된다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금 시몽동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 우둔함은 기술적 개체화의 원초적 조건과 상응한다 테크놀로지는 이미 주어진 형태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마치 새로운 도구나 기계가 탄생할 때 그것은 단순히 기존 질서의 반복이 아니라 바탕 속 힘들의 진동이 특정한 형태로 고정화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들뢰즈의 우둔함은 바로 그 순간 왜 정말 왜 때문에 지금 이 테크놀로지가 개체화되는가를 설명하는 역동적 공백의 대안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셸링의 원근거Urgrund와 비근거Ungrund의 동일시를 소환해야만 한다 셸링은 악을 단순한 부정적 타자가 아니라 들뢰즈의 초월론적 우둔함을 내포한 신성 그 자체에서 비롯된 근본적 긴장으로 보았다 악은 신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개체화된 악은 보편의지의 자리를 점하려는 자기 의지의 과잉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야 이는 우둔함과 맞닿는다 우둔함이 사유를 강제하는 비근거라면 악은 존재 전체를 균열 내는 과잉의 자기 의지의 표상이다 두 경우 모두 존재의 체계가 내부에서 흔들리며 새로운 분기선을 여는 계기를 뜻한다 그리하여 그래 그리하여 이 접속 부사를 얼마나 쓰는지 입이 아플 정도지만 테크놀로지는 단순한 총체나 바탕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테크놀로지는 언제나 우둔함과 악 즉 균열의 계기와 함께 나타나며 그 균열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한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기인한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의 시초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돌고 돌아 테크놀로지적 인프라는 단순히 마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술적 단계를 보완하고 확장하면서 자연과 테크놀로지의 공존적 지위를 지탱한다 현대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에 테크놀로지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인간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기 내부의 우둔함과 악 즉 내적 균열을 제도화된 형태로 전환한다 결국 시몽동이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단순한 도구나 기계가 아니라 세계 속 개체화의 앙상블이다 그것은 바탕의 잠재성과 모양의 현실성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만들어내는 역동적 네트워크다 우둔함은 그 앙상블을 촉발하는 진동이며 악은 그 앙상블을 전복하는 위험이자 동시에 창발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몽동은 바로 이 긴장 속에서 테크놀로지를 그 이른 시간에 사유한다 아니 사유했다 테크놀로지는 마술과 종교의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로질러 다시 재구성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