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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선 Sep 13. 2022

우리들의 낡고 닳아빠진 영웅

내가 어른이 된 이야기

이미지 커버 출처: 장환, 영웅 No2


제주 탑동에 있는 아라리오 미술관에는 중국 작가 장환의 <영웅 No 2>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거인이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으로 가로길이가 4.6미터, 전체 길이는 10.7미터, 높이는 5.2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입니다. 나무와 철로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소가족으로 외피를 입혀 만든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소가죽을 갈기갈기 찢고 닳게 만들어 괴이하다고 할 수도 공포스럽다 할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인 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름답다’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거리가 멉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규모 자체에 압도되는 이 작품을 멀찌감치 보았을 때는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습니다.      


거인이네. 역시 대륙의 작가는 스케일이 압도적이군. 소가죽이 누런 강물이 흐르는 중국의 황화처럼 진하고 탁하네.. 같은 짧은 생각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막연한 호기심에 이끌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저도 모르게 ‘아...’하고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작가가 왜 이 작품 ‘영웅’이라이름 붙였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기다란 거인의 형상 위로 두 개의 둥그런 물체가 얹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쪽 허벅지에 또 다른 하나는 오른쪽 어깨에 얹어져 있는데, 두 개의 둥그런 물체아이의 형상으로 보였습니다.


거인 위에 물체들이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거인은 거인이 아닌 영웅으로 변했습니다. 저렇게 속살이 다 드러날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것은 자기가 거인임을 증명하려고 싸운 것이 아니었구나. 오른쪽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에 소중하게 얹어놓 아이들을 지키느라 팔다리가 헤지고 몸통이 뜯어졌다는 스토리가 작품 위에 펼쳐졌습니다.


자기의 힘이나 능력을 과시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하는  이를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거인이라고 하거나 전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영웅으로 부른다면 그 영웅은 몸을 부서뜨리면서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소중하게 지켜냅니다.

      

그렇게 영웅의 참 영웅다운 면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전날 제주도 해안가를 산책하면서 떠올린 해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제주를 방문했을 무렵 2022년 봄 즈음이었는데, 제주도민을 주인공으로 한 tvN의 <우리들의 블루스>가 한창 방영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현춘희 역을 한 고두심 씨의 해녀 연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이면 또 어떤 결심이면 저렇게 새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숨을 참고 깊은 바다로 텀벙 들어갈 수 있을까 서였습니다. 극 중에서 춘희의 욕망은 다 죽고 하나 남은 자식, 아들 만수가 외지 목포에서 제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들이 갈치 배를 타겠다고 하면 그 배를 기어이 사 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 자신의 욕망이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부서질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해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장환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울 집에 있는 두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올해 초 암수술을 받고 일종의 요양 여행을 제주로 떠났습니다. 암이 누구에게나 그렇듯 꽤 많이 놀랬고 적잖이 당황하고 상당히 낙담했습니다. 마음을 달래고 싶어 떠난 여행 중에 전 영웅을 만났습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제 마음속 깊은 곳에는 신이던 누구든 저를 지켜줄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닌 척했지만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의 영웅이 되어줄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잠깐 속마음을 나누고 걱정을 덜어줄 사람들이야 있지만 저를 위해 자기 몸을 영웅처럼 내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누가 그렇게 한다 해도 제가 사양하고 싶습니다. 가족의 이름으로라도 칠순인 늙은 어머니, 세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는 남동생이 저의 영웅이 되는 것은 정말 끝까지 사양하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잠깐 나기는 했지만 그저 그리울 뿐이었습니다. 다들 자기 삶을 사느라 벅차고 힘든데 누구에게 나의 영웅이 되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신께 매달리던 때도 있었지만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다 보니 구원을 구하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습니다.      


대신 두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암 진단받았다는 엄마를 보고 “죽지 마, 엄마”라고 어깨를 만져주던 아들,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 몸만큼 큰 책가방을 메고 학교와 학원을 오고 가는 딸의 모습이 장환의 어깨와 무릎 위에 걸터앉은 아이들 모습 위로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들 영웅이 되어줄게. 내 몸이 낡고 닳아빠질 때까지 내가 너희들 영웅이 되어줄게”라고요. 누군가 내게 해주기를 바라던 것을 꼭 내가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낡고 닳아빠질 때까지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던 소망, 간절히 원해도 용쓰고 악써도 얻을 수 없으면 내가 그것을 누군가에게 해주어도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감사한 것은 내 몸과 마음을 내어줄 대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누군가를 찾았겠지만, 신은 저에게 또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수고까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감사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자 내가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치유되고 성장할 때는 몸 안쪽에서 전환(shift)이 되는 큰 감각이 일어나는데, 저는 장환의 작품 앞에서 작품의 든든함과 묵직함이 제 안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10미터가 넘는, 철과 소가죽으로 만든 형상, 그 형상 속에 작가가 담았을 영웅의 영혼이 제 안으로 은은하게 번졌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그렇게 더 어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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