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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선 Sep 20. 2022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를 소개합니다.

결국에는 사랑이다

정신분석학파의 심리학자 중에는 카렌 호나이(1885-1952)를 좋아한다. 프로이트를 따르다 프로이트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이론을 정립한 학자들이야 여럿 되지만 (칼 구스타프 융, 알프레드 아들러 등) 그녀의 이론만큼 인간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고 그래서 치료 현장의 내담자들을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신분석학자는 없는 것 같다. 


사족을 붙이자면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마음은 경외심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 글은 프로이트는 틀리고 카렌 호나이는 맞다는 식의 글이 아님을 밝힌다. 


다시 카렌 호나이로 돌아와서, 그녀는 프로이트와 이렇게 차별된다. 아이의 성격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오이디푸스 강박 관념이 아니고 사랑받는 느낌이라고 했으며, 인간이 폭력적이 되는 것은 타고난 파괴 본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위험에 빠지거나 모욕당했거나 이용당했거나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녀의 이론은 어떤 정신분석적 설명보다 간단하고 명백하다. 프로이트나 융처럼 은유나 상징, 신화와 역사를 빌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 이해에 대한 관점이 다르면 심리문제를 치료하는 접근법도 다르다. 프로이트처럼, 육체의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욕구 조절이 안 되어서 심리문제가 생긴다고 보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본능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반면,  카렌 호나이처럼 심리 문제가 인간관계에서 압박받을 때 발병한다고 보면, 관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쯤 되면, 관계의 압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방법론이 궁금해지겠지만, 우선 이렇게 인간 이해에 대한 관점이 다르면 치료자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프로이트에서 카렌 호나이로 관점이 바뀌면 치료자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된다. 내담자의 모든 욕구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빈 스크린이 되는 프로이트적 치료자의 자세에서 관계의 억압에서 찌들어 고통받는 마음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가는 카렌 호나이적 치료자의 자세가 된다. 이 둘 중 무엇이 맞고, 무엇이 더 우세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 카렌 호나이의 능동적 자세는 분명 치료적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비단 치료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지 않은가?  누군가 나를 돕기 위해 능동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받은 느낌이 부족하고, 위험에 빠지고 모욕당하고 이용당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이런 헌신은 감동을 넘어서 치유적이다.


그런데 마음을 고치러 온 사람들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과 동시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래서 치료자들은 프로이트와 카렌 호나이 중간쯤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 치료자들이 "주려고도 하지 말고 주지 않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토를 가슴속 어딘가에 새기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프로이트처럼 너무 물러나면 사랑이 모자라 성이 나고, 반대로 너무 능동적으로 다가오면 거북하고 어색해하는 것이 상담실의 내담자이자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마음을 고칠 때는 어떤 특정 학파의 이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한 사람의 치료 이론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프로이트가 되어, 때로는 카렌 호나이가 되어, 때로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아픈 마음을 만난다. 그렇게 더 큰 사랑을 품어본다.


 



인간관계의 압박감에서 오는 불안감을 다스리는 법은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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