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고치는 이야기
우울증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면서 자주 발견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울증 환자의 심리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이란 진단명으로의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NPD)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보다 넓은, NPD를 포함하는 자기애적 특징을 의미하는 폭넓은 개념임을 밝힙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자기애(自己愛, Self-love)로 번역하는데, 번역한 단어만 놓고 보면 무엇이 문제인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요. 건전한 자기애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병리적 자기애, 병리적 나르시시즘입니다.
병리적 자기애의 대표적인 특징은 ‘거대성’입니다. 이 거대성은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자신을 엄청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확인과 인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현실에서 어떤 위치이고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거대성은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중에는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르시시즘의 거대성이 사람을 사회적으로 성공시키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르시시즘이 좋은 것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르시시즘의 발동으로 이루어낸 성공이나 지위는 충족감을 오래 얻기가 어렵습니다. 나르시시즘의 특성을 갖은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합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성공을 이루고 난 후에 또 다른 성공을 찾아 헤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성공은 자아실현이나 성장보다는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이들의 성공을 인정해 줘도 그때뿐입니다. 이들은 타인의 인정을 내재화하는 능력 또는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한 번의 성공 경험을 이루고 나면 또 다른 성공 경험을 찾아 나섭니다. 그 모습은 마치 허기진 늑대가 눈에 불을 켜고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르시시스트라 하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들이 혼자서 잘 지내고 독립적일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혼자서 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거대성을 인정해 줄 사람이 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코헛은 이런 외부 대상을 가리켜 자기-대상(self-object)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거대성이 유지되는지 안 되는지,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느낌이나 감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확인하는데 반드시 제삼자, 타인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나르시시스트 곁에서 그 거대성을 인정해 주는 입장도 참 피곤합니다.
글 서두에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나르시시즘을 공통으로 발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서는 왜 나르시시즘이 발견되는 것일까요? 나르시시즘이 있으면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감정을 잘 다루려면 자기 내면에 집중해야 하는데 나르시시즘의 거대성은 내면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기에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내면이나 감정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을 쓰기 바쁘니까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처리되지 않는 과거가 쌓인다는 것이고, 이러한 긴장이 우울증에 취약하게 만듭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늘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처럼 실패해서도 안 되고, 실망해서도 안 되고, 속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이 졌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안 괜찮아도 괜찮은 척, 속에서 열불이 나도 행복한 척합니다. 겉모습과 속마음 차이가 심하고 부정적 감정 처리가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집니다,
늘 특별한 존재로 보이려면 힘들 텐데 왜 저렇게 힘들게 사나 싶겠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들에게는 ‘우월한 나’만 허락되며 ‘열등한 나’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주변에서 “너무 피곤할 텐데 좀 여유를 갖고 살아봐요.”라고 권한다고 쉽게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없단 말입니다. 멋지고 당당한 겉모습 뒤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연약한 자기를 숨기고 있는 것인 나르시시스트의 진짜 모습입니다. 자존감을 타인에게서만 확인해야만 하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지독한 비효율적 삶의 방식을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려울 때가 옵니다. 언젠가는 자존감이 꺾이고 자기애가 손상됩니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의 거대성이 꺾이는 때, 자기애에 심각한 손상이 올 때 밀려옵니다.
나르시시즘은 현대인의 병이라고도 합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남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살아남는 현대 사회는 나르시시즘이 자라나기 좋은 환경입니다. SNS의 발달로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손쉽게 드러내고 서로를 비교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도 남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나르시시즘이 자극되는 환경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뿌리를 둔 우울증을 고칠 때 필요한 것은 잔뜩 부풀려진 거대성이 마음속에 출몰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쩍거리는 가짜 자기라도 있어야 자존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수치심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르시시즘은 부모의 공감 실패로 생긴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절대적인 왕자님이자 공주님인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다 점차 자신들이 왕자도 공주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죠. 유아기에는 정상적이었던 거대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보통 이 과정은 수차례에 걸쳐서 천천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너무 갑작스럽거나 일방적이면 아이는 수치심을 느낍니다. 이때 느끼는 수치심에 부모가 공감해주지 못하면 나르시시즘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심리적 독립을 이루어 나가는 성장 과정에서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공감받지 못하는 수치심은 나르시시즘의 거대성, 부풀려진 자기를 탄생시킵니다.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상담실에서 이 수치스러움이 공명될 때 자기애의 저주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 수치스러움을 치료실에서 드러내려면 치료 관계에서 상당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상담사에 대한 신뢰를 쌓기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이 심각할수록 우울증 치료가 어렵고 치료의 기간도 오래 걸립니다.
'마음을 고치는 이야기'는 정신과 치료실에서 마음을 고치는 이야기로,
건강선교잡지 『건강과 생명』에 기고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