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시간 FM 라디오 방송, 두 명의 여자 DJ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주거니 받거니 잔잔한 목소리가 듣기 좋다. 요즘 들어 저렇게 따뜻한 목소리가 잘 들린다. 따뜻함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힘들수록 재빠른 걸음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힘들수록 재빠른 걸음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디서 그렇게 기운이 나는지 모르겠다. 온종일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잠시 쉬었다가 또 그렇게 뛰어다닌다. 나에게도 저런 에너지가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몇십 년을 살았으니 그때 같을 수야 있을까.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다. 해야 할 일도 많다. 재빠른 걸음으로 뛰어넘는 것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법을 찾아야 한다. 난 그 방법을 주짓수 체육관에서 찾았다.
수련 첫날, 준비운동이라며 수련생들이 삼열 종대로 줄을 맞춰 몸을 굴렸다. 앞구르기를 시작으로 옆구르기, 뒤구르기를 하는데 사람들은 참 잘도 굴렀다. 따라 하면 되겠지 하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는데 발바닥에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몸이 꿈적도 안 한다. "이게 맞나 아닌가? 분명히 안될 텐데. 이러다 다치는 것 아니야?" 생각에 갇혀 버리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양옆에는 스포츠카가 쌩쌩 달리는데, 길 한복판을 막고 있는 고물차가 된 기분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정수리를 바닥에 박고 몸을 던졌다가 '쿵'하고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진 적도 있다. 구르기에는 요령이 있었다. 몸을 둥글게, 머리 뒤쪽이 바닥에 닿게, 힘을 빼고 굴려야 부드럽게 구를 수 있었다. 잘 구르는 사람일수록 몸에 힘을 다 빼고 굴렸다. 그 사람들은 시작만 하면 굴러간다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 겁을 먹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힘을 빼고 구르기를 시작하면 바퀴가 굴러가듯 앞으로 나아갔다. 두 다리를 힘차게 움직여 재빠르게 달려 나가지 않아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 혼자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작만 하면 땅의 힘이 나를 끌어당겨 결국에는 한 바퀴를 구르게 해 주었다. 한 번 구르고 나면 몸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따뜻해진 기운으로 또 한 바퀴를 구를 수 있었다.
시작만 하면 땅의 힘이 나를 끌어당겨 결국에는 한 바퀴를 구르게 해 주었다.
사진 : Paul Kee Jaen
몸을 동그랗게 굴리는 움직임은 앞으로 나아가는데만 쓰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몸을 말고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상대를 묶었다가 넘어뜨리면 암바 기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내 힘으로만 밀쳐내서는 꿈쩍도 할 것 같지 않은 크고 강한 상대가 흔들리고 넘어갔다.
내가 가진 힘만으로 살아내려니 겁이 나고 두렵다. 겁이 나서 얼어붙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럴 때 누가 옆에서 재빠른 걸음으로 뛰어넘으라고 하면 더 얼어붙어 버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꼭 뛰어가지 않아도 된다. 뛰는 것만큼 빠르지 않지만, 천천히 굴러가는 법도 있다. 그러려면 우선 힘을 빼야 한다. 땅의 힘도 믿어야 한다. 혼자 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우선 시작을 한다. 작은 움직임이라 당장은 성에 차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 참 잘했구나 싶을 때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