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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선 Feb 24. 2022

심리치료, 있는 그대로의 현실 보기

정신과 상담실에서 마음을 고치는 이야기

심리치료라는 양날의 검이 있다면 한쪽은 위로라는 날이, 다른 한쪽은 직면이라는 날이 있을 겁니다. 아픈 마음을 고치려면 이 검의 양날을 모두 써야 합니다. 위로라는 날만 쓰면 변화가 더디고, 직면이라는 날만 쓰면 치료가 중단의 위기를 겪습니다. 심리치료를 검에 비유하는 것은 마음의 외과수술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느 내담자의 호소

“선생님, 오늘이 열 번째 상담인데 그동안 위로도 받고 공감도 받았는데 그게 다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차려 표현해주면 상담사는 상당히 반갑습니다. 이 분은 상담사가 그동안 자신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무엇을 덜 주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무기력과 공황, 심각한 자책감과 반복되는 자해 등의 증상을 보이던 분을 치료하면서 저는 10회기 내내 위로, 공감, 지지 중심의 치료를 했습니다. 증상이 심각한 편이라 직면이나 해석 등을 섣불리 하면 상담이 조기종결 (상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상담이 중단되는 것)될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동안의 치료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이렇게 먼저 말해주니 고마웠습니다. 10회기 이후부터 그동안 미뤄두었던 치료를 차근차근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상담사에게 전달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정신과 상담실에 오신 분들은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픈 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신과 상담실에 오시면 누구라도 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심리치료라는 검의 양날을 모두 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적당히 좋은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대상(object)이라는 단어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단어는 프로이트가 만든 단어인데,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추측하고 상상한 대로 인식하더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대상'은 세상을 볼 때 눈앞에 펼쳐지는 필름 같은 것인데, 누군가를 만날 때 자동적으로 마음속에서 튀어나옵니다. 마치 색이 있는 필름과 같아서 상대의 모습을 왜곡시킵니다. 어린 시절에 대부분 완성되지만 평생에 걸쳐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건강한 ‘대상’은 투명하고 굴절이 없는 깨끗한 필름처럼 세상을 왜곡시키지 않습니다.      


이 대상은 어린 시절에 양육자로부터 받은 강렬한 '좋은'경험과 '나쁜'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여기서 좋은 경험이란 양육자가 아이의 요구를 채워주었던 것을, 나쁜 경험이란 아이의 요구를 거절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좋고 나쁜 경험에 따라 아이들은 반응을 하는데. 바로 이 아이들의 반응이 대상을 구성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똑같이 대했는데 자녀들이 각각 부모를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대상’이 부모님이 아이에게 주는 양육의 합이 아니라 아이의 반응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비슷하게 대해주더라도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진 아이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양육자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정반대의 대상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큰 아이가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어.’라고 생각할 때, 둘째 아이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하게 무시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음속에 어떤 모습의 대상이 있는지에 따라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상당히 왜곡해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건강한 대상, 즉 현실을 덜 왜곡하는 대상이 자리 잡기를 바라야 합니다.    

  

건강한 대상 형상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극단적으로 좋은' 경험 또는 '극단적으로 나쁜'경험을 주는 양육입니다. 아이를 지나치게 만족시키거나 지나치게 좌절시키는 양육은 타인을 왜곡시키는 '대상'을 만듭니다. 이러한 대상이 만들어지면 적당히 만족하기 어렵고, 불편함을 절망감으로 느낍니다. 과도한 인정을 받고 싶어 사랑을 갈구하거나, 지나치게 사람을 경계하는 것 모두 마음속에 자리 잡힌, 현실을 왜곡시키는 '대상'때문입니다.

      

이렇게 왜곡시키는 대상을 갖고 살면 완벽주의, 성공 집착이 생겨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하고, 경계심이나 적개심이 생겨 대인관계가 어려워집니다. 일상을 버티는 게 점점 지치고 겁이 나 결국 번아웃이나 우울증이 생길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생긴 우울증을 치료하려면 '적당히 좋은 대상'이 필요합니다. 심리치료에서 심리상담사가 해주는 역할이 바로 이 '적당히 좋은 대상'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적당히 좋은 대상이란 극단적으로 충족시키지도 좌절시키지도 않는 대상입니다.

       

위로 중심의 심리치료가 아픈 마음을 고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그렇게 하다 보면 극단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상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상 경험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으로 좌절하는 대상 경험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안 좋은 것이 좌절시키는 대상 경험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좌절시키는 경험을 반복하면 증오와 적개심을 갖게 되고, 세상과 타인을 착취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이 만들어집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적당히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는 적당히 좋은 대상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적당히 좋은 대상이 되려면 그 사람의 현재 '대상'이 어떤 경험들의 반응들로 구성되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런 깊이 있는 이해는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고치는 작업, 심리치료는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대상을 덜 왜곡시키도록 변화시키는 총체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마음의 고통은 크게 줄어듭니다.     



본 글은 의학 전문 잡지 건강과 생명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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