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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선 Mar 29. 2022

마음을 고치는 나라

입국 서류 작성

입국 서류 작성  


심리치료실 대기실이 시끌시끌합니다. 누군가 언성을 높여 불평을 하는 소리가 치료실 문을 넘어 들려옵니다. 대기실에서는 보통 큰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치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비치되어 있는 책이나 잡지를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는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무슨 일인지 나가 보았습니다. 대기실에서 안내를 맡아 주시는 선생님이 한 여자분 앞에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삼십 대 여성, 이 분이 시끌시끌한 소리의 주인공이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라고 묻자, 소리의 주인공은 팔짱을 풀며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기 이 설문지를 다 적어야 하나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니, 치료를 시작하는 분들이 심리치료실 방문 첫째 날에 적는 설문지였습니다. 심리치료실을 방문하면 이름을 포함한 개인정보, 가족관계, 치료실 방문 목적, 건강상태 등의 정보를 적게 되어있습니다. 치료기관에 따라 양식의 형태나 적어야 하는 양이 다양한데 저희 치료실은 한 페이지 정도의 최소한의 정보만을 적게끔 되어있습니다.

“네. 가능한 꼼꼼히 적어주시면 좋습니다. 다 적기 힘드시면 적을 수 있는 것만 적어주세요.”

“적을 수 있는 것은 다 적었어요.”라고 하며 다시 팔짱을 단단히 끼는 기세를 보아하니 대기실에서 옥신각신하며 해결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설문지를 얼마만큼 적었나 보았더니 성명과 직업 칸만이 채워졌습니다. <성명: 류정은, 직업: 개인사업> 성명 칸에 채워진 이름을 보니, 다음 치료 시간에 예약되어있는 분이었습니다.      

“정은님, 제가 오늘 만나기로 되어있는 안유선 상담사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그렇게 저와 정은님은 저의 치료실, 마음을 고치는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정은님의 입국은 시작부터 삐거덕 거렸습니다. 정은님에게는 입국 서류가 없었습니다. 치료실에 온 사람이 누구이며, 왜 왔으며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서류가 없었습니다.

설문지를 작성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치료사들은 이 서류에 적힌 내용을 보고 치료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가늠하고, 어떤 질문을 해나갈지 계획을 세웁니다. 정은님은 자신이 자신의 치료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우선 정은님이 설문지를 적지 않겠다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이 이유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치료는커녕 치료실에 온 목적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설문지를 적기 힘드신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힘든 게 아니요. 적기 싫은 거예요.”   

태연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문지를 적기 싫으면 집에 가세요.’라고 하고 싶어 졌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은님은 제가 자신의 치료사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싸움을 걸어온다고 싸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사람을 믿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뚜껑이 덜 닫힌 채 끓어오르고 있는 주전자처럼 화를 들썩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대로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과, 조금이라도 화를 덜어주고 싶은 생각이 번갈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정은님이 말을 더 이어갔습니다.   

“선생님이 물어봐주셔도 되잖아요. 적고 싶지 않아요.”

“적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으실까요?”

“저는 고민을 털어버리려고 왔어요. 글로 적으면 고민이 더 선명해질 것 같아요.”

‘말을 하면 고민이 선명해지지는 않으실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치료자를 향해 힘겨루기를 하는 그녀 마음에 제 마음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정은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치료사가 하나씩 질문을 해가면서 답을 듣고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습니다.

심리치료실 방문 첫날, 낯선 사람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 부담감이 생기면 치료사와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힘겨루기 모양은 치료실을 방문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의미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도 하고, 치료자가 너무 싫어지거나 너무 좋아져서 치료에 집중하기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심리 용어로 '저항'이라고 합니다.


이 일련의 저항들은 모두 치료를 더디게 만들지만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힘겨루기는 치료자 입장에서 부담이 큽니다. 특히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는 힘겨루기는 예후가 나쁜 경우가 많습니다. 치료를 받는 분이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문지 작성을 다 해주기 어렵다면,  ‘치료기관에 방문하신 이유’라고 되어있는 부분만이라도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설문지 전체를 적기 힘들다는 정은님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치료자 입장에서는 설문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제 입장에서 제시하는 나름의 절충안이었습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 작성해야 하는 기본적인 사항이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이 돌아왔습니다.

“기본적인 사항이니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정은님은 화를 낼 사람이 필요한 것 같기도 했고, 맞부딪혀 싸워줄 사람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설문지 내용을 채울 것인가 말 것인가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지금 저와 정은님 사이의 힘겨루기가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앞으로 해나갈 작업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힘겨루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치료를 튼튼하게 뒷받침해 줄 것들이 필요합니다. 저희 앞에 놓여 있는 이 설문지를 작성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틀을 이루고 그 틀이 치료를 든든하게 유지합니다. 오늘 작성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다음 시간에 오셔서 작성해주시면 좋겠는데 어떠신가요?”

“그러니까 설문지 작성을 안 하면 치료를 안 해주시겠다는 거죠?”

“그것이 정은님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만큼 치료를 위해서 지켜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저는 정은님이 걸어오는 싸움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치료 첫 시간에 해야 하는 치료의 틀을 잡는 치료 ‘구조화’를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고치는 나라>에 치료 사례 내담자 보호 차원에서  모두 창작된 사례만 사용하였을 알려드립니다. 실제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여러 사례를 합성하였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되도록 내용을 각색하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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