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상 Nov 22. 2018

아기 만난 날

20180526 '글쎄, 이건 무슨 감정일까'



<2018년 5월 26일>
눈을 뜨니 다섯 시다. 병실 블라인드 밖으로 빛이 들어오는 걸 한참 보다가 일어났다. 아내 숨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어젯밤은 잘 잤나 보다.

간밤에 아내가 화를 냈다. 출산 전 마지막이 될 것 같다던 그 빙수를 내가 엉뚱한 걸로 사왔기 때문이다. 몇 스푼 뜨던 아내가 맛없어서 못먹겠다며 등돌리고 누워버렸고 맛있는데 왜 그래, 난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사오냐고, 씩씩거리다가 조용해져서 보니 어느 새 자고 있다. 왠지 측은해져 지켜 보다가 남은 빙수를 먹고 보호자 침대에 누워 축구 기사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출산 전날 밤이 될 거란 걸 모른 채.

낮에는 아내 회사 동료가 찾아와서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 내가 대화에 낄 틈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두 여자의 속도를 따라가기엔 내가 느렸다. 아무튼 이 분이 맛난 아이스크림을 사오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앞으로 이거 많이 사먹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내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지난 2주간 입원해 있느라 지칠 법도 한데 잘 버텨줘서 고맙다. 그래 내가 가로수길 가서 사올게 언제든 말만 해, 우린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서로 웃었다.


여벌옷을 챙길  집에 다녀왔다. 해도 뉘엿뉘엿 저물었다. 병원에서 출퇴근한  2주가 되어 간다. 집이 낯설다. 아내가 주문해 놓은 택배 박스가 현관에 쌓여 있다. 빨래 돌리고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카톡이  있었다.


'오늘 분만한대 가족분만실로 옮김'


오마이갓,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분당에 있던 처제도 조금  왔고 주말이라 쉬고 계시던 담당의 선생님도 도착하셨다.

어린 시절 아내는 여동생에게  아기 대신 낳아 주면 안되겠냐는 철없는 소리를 했다가 장모님께 크게 혼났더랬다. 인생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순간이 지금 벌컥 다가온 것이다. 긴장을   있게 가족분만실에서 농담을 하면서 웃던  간호사들이 보호자분들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라고 말하며 들어 왔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 주는데, 지난 2주간 주사 맞은 자국이  팔에 퍼렇다.  내라는 눈빛을 쏘아 주며 나오는 순간 걱정이 많이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 선생님이 콜을 받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출산 임박이네요, 처제가 말했다. 처제는 인턴 시절 산부인과에서도 배운  있기 때문에 병원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앞에 있으니 안에서 숫자 세는 소리가 들렸다. 호흡을 하면서 힘을 주라는 신호일 것이다. 그렇게  사이클을 하다가 순간 귀엽네요, 간호사  명이 말했다. 귀엽다고, 아니, 아기 얼굴이 나온건가? 궁금했다. 그리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글쎄, 이건 무슨 감정일까.
눈을 비비며 입실용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했다.

아빠 들어오세요, 라는 신호와 함께 문이 열렸다.  태어난 생명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가위를 받아 탯줄을 자르는데 미끌거려서  번에 잘리지가 않았다. 싹둑. 피가 출렁였다. 시계가 여덟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내는 평온한 표정이다.
드라마를 보면  산모가 비명을 지르고 거의 숨이 넘어갈 때쯤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런 뻔한 클리셰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세상의 모든 연출자들에게 
 자네의 진부한 표현 속에는 삶의 정수가 녹아 있군, 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관대한 기분이다.
아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생각보다 아기가 금방 나왔다.
사실 금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아기가 성장하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갈 지도 모른다.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시한부 선물이라 생각한다. 내일부터 우리의 삶은 어제까지와는 많이 달라지겠지.
  성수대교남단 교차로에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를 차들이 저마다의 불빛을 아름답게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이젠 밤이 되어도 공기가 뜨끈하다. 여름 바람이 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