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6 '글쎄, 이건 무슨 감정일까'
<2018년 5월 26일>
눈을 뜨니 다섯 시다. 병실 블라인드 밖으로 빛이 들어오는 걸 한참 보다가 일어났다. 아내 숨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어젯밤은 잘 잤나 보다.
간밤에 아내가 화를 냈다. 출산 전 마지막이 될 것 같다던 그 빙수를 내가 엉뚱한 걸로 사왔기 때문이다. 몇 스푼 뜨던 아내가 맛없어서 못먹겠다며 등돌리고 누워버렸고 맛있는데 왜 그래, 난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사오냐고, 씩씩거리다가 조용해져서 보니 어느 새 자고 있다. 왠지 측은해져 지켜 보다가 남은 빙수를 먹고 보호자 침대에 누워 축구 기사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출산 전날 밤이 될 거란 걸 모른 채.
낮에는 아내 회사 동료가 찾아와서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 내가 대화에 낄 틈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두 여자의 속도를 따라가기엔 내가 느렸다. 아무튼 이 분이 맛난 아이스크림을 사오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앞으로 이거 많이 사먹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내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지난 2주간 입원해 있느라 지칠 법도 한데 잘 버텨줘서 고맙다. 그래 내가 가로수길 가서 사올게 언제든 말만 해, 우린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서로 웃었다.
여벌옷을 챙길 겸 집에 다녀왔다. 해도 뉘엿뉘엿 저물었다. 병원에서 출퇴근한 지 2주가 되어 간다. 집이 낯설다. 아내가 주문해 놓은 택배 박스가 현관에 쌓여 있다. 빨래 돌리고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카톡이 와 있었다.
'오늘 분만한대 가족분만실로 옮김'
오마이갓,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분당에 있던 처제도 조금 뒤 왔고 주말이라 쉬고 계시던 담당의 선생님도 도착하셨다.
어린 시절 아내는 여동생에게 내 아기 대신 낳아 주면 안되겠냐는 철없는 소리를 했다가 장모님께 크게 혼났더랬다. 인생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그 순간이 지금 벌컥 다가온 것이다. 긴장을 풀 수 있게 가족분만실에서 농담을 하면서 웃던 중 간호사들이 보호자분들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라고 말하며 들어 왔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 주는데, 지난 2주간 주사 맞은 자국이 양 팔에 퍼렇다. 힘 내라는 눈빛을 쏘아 주며 나오는 순간 걱정이 많이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 선생님이 콜을 받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출산 임박이네요, 처제가 말했다. 처제는 인턴 시절 산부인과에서도 배운 적 있기 때문에 병원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문 앞에 있으니 안에서 숫자 세는 소리가 들렸다. 호흡을 하면서 힘을 주라는 신호일 것이다. 그렇게 몇 사이클을 하다가 순간 귀엽네요, 간호사 한 명이 말했다. 귀엽다고, 아니, 아기 얼굴이 나온건가? 궁금했다. 그리고 곧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글쎄, 이건 무슨 감정일까.
눈을 비비며 입실용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했다.
아빠 들어오세요, 라는 신호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갓 태어난 생명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가위를 받아 탯줄을 자르는데 미끌거려서 한 번에 잘리지가 않았다. 싹둑. 피가 출렁였다. 시계가 여덟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내는 평온한 표정이다.
드라마를 보면 늘 산모가 비명을 지르고 거의 숨이 넘어갈 때쯤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런 뻔한 클리셰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세상의 모든 연출자들에게
음 자네의 진부한 표현 속에는 삶의 정수가 녹아 있군, 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관대한 기분이다.
아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생각보다 아기가 금방 나왔다.
사실 금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 아기가 성장하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갈 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시한부 선물이라 생각한다. 내일부터 우리의 삶은 어제까지와는 많이 달라지겠지.
창 밖 성수대교남단 교차로에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를 차들이 저마다의 불빛을 아름답게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이젠 밤이 되어도 공기가 뜨끈하다. 여름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