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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Jul 29. 2021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맛의 범위

엄마 혼자 카페에 간다면



‘내심 기대하는 눈빛’이라는 게 있다


본가에 가면 엄마가 나에게 잘 선보이는 건데, 잘 쉬다가 이제 다시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 눈빛이 등장한다.


“엄마, 나 인제 가려고.”

“왜 벌써가. 저녁까지 먹고 가지.”

“아니야, 저녁엔 서울에서 친구랑 약속 있어.”

“그래? 그럼 해 지기 전에 나서.”


이때 내 주머니에서 용돈이 든 봉투가 나오길 내심 기대하는 바로 그 눈빛이다. 금액이 큰 것도 아니고, 용돈을 주고받는 풍경도 민망해서 집을 떠날 때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더니, 언젠가부터 그게 엄마와 나 사이의 규칙처럼 굳어졌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수입이 적어서 용돈을 드리지는 못하고 식사로 대신했다. 엄마한테 미리 이번에는 드릴 게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헤어지는 순간에 조금 허전하기는 했다. 그건 아마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심 기대하는 눈빛을 알고 있던 나는 자꾸만 미안해졌다. 미안해지는 내 마음을 감당하려다 그만 또 심술궂은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엄마도 나에게 해준 게 없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자고.



이런 마음들은

왜 자꾸 생기는 걸까


엄마가 나에게 보통의 자식 역할을 내심 기대할 때마다, 그리고 나는 그걸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안 될 때마다 모난 마음이 튀어나온다. 엄마의 전화에 ‘응’이라는 대답만 반복하다 끊을 때나, 밖이라는 이유로 가끔씩 전화를 받지 않고 무시할 때, 그렇게 엄마에게 자꾸 소홀해질 때마다 나는 엄마 핑계를 댔던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보통의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꿈꿨고 닮아가고 싶었는데, 그건 바깥에 보이는 내 모습의 ‘평범’이었지, 엄마에게 ‘평범’한 아들은 되지 못했다. 엄마가 객관적으로 엄마의 역할이 조금 부족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부족한 아들이 될 필요는 없었는데. 자기를 닮아가는, 자꾸 비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늘 미안하다고만 했던 엄마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치도 그렇다.

“집 갈 때 김치 좀 가져가. 이번에 맛있게 됐어.”

“괜찮아. 사 먹으면 돼. 그리고 원룸이라서 김치 많이 갖다 놓으면 방에 금방 냄새 배.”


엄마가 자취방에 김치 좀 가져가라고 하면 나는 괜찮다고 했다. 무겁기도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해왔던 이런 엄마다운 모습을 겪은 뒤에, 내가 아들다운 모습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갑자기 기온이 확 올라, 얼굴이 발그스레해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두 명의 청년과 어머니가 들어왔다. 청년들은 나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대학생쯤 됐을까. 세 모자는 쇼핑을 하고 잠깐 땀을 식히려 카페에 들어온 모양. 작은아들의 핸드폰을 새로 산 것 같았는데 그는 주문은 뒷전이고 아이폰을 꺼내 이리저리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큰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뭐 마실래?”

“그때 마셨던 거 있잖아.”

“그게 뭐지?”

“그거, 카페인 없는 거. 엄마 요즘 커피 마시면 잠을 잘 못 자.”

“디카페인?”

“아니, 카페인 없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디카페인이야. 엄마.”


대화를 몰래 훔쳐 듣고 살짝 웃었다. 아들은 포기하지 않고 엄마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서 결국 엄마를 이해시켰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나였으면 그냥 설명하지 않고 알아서 시켰을 것이다. 엄마가 설명을 요구했다면 잘 못 알아듣는 엄마에게 답답함이 차올랐을 것이다. 가끔씩 이모와 엄마와 할머니와 카페를 가면, 나는 “엄마는 뭐 마실래? 단 거 시킨다?”하고 바닐라라테 아이스를 시켰다.(우리 엄마는 열이 많아서 뜨거운 음료는 아예 안 마신다.) 요즘 카페에 달콤한 음료가 얼마나 많은데… 나도 다 먹어보지 못한 다양한 메뉴들이 하루를 다투며 새롭게 출시되는데. 나도 커피 종류를 잘은 모르지만, 바닐라라테도 캐러멜 마키아토도 아인 슈페너도 다 한 번씩 맛보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일을 내가 해주지 못했다.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혹시나 엄마 입맛에 안 맞을까 봐, 괜히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게 싫어서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엄마가 경험할 수 있는

맛의 범위를 좁히며 살았다


“엄마는 커피 마셔도 잘 자지? 그래도 이번엔 디카페인으로 마셔 봐. 쓴 커피가 싫어도 건강을 생각해서 너무 단 건 먹지 마. 콜드브루는 또 그렇게 안 쓸 걸? 그런 거 마셔봐.” 말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단 자주 봐야 하는데.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엄마 인생에 커피는 맥심과 카누뿐일 텐데. 언제 다시 연락을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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