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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04. 2021

무언가를 증명하는 게 삶의 목적이 돼버린 것 같아

내 일기는 백예린 인스타식으로 찍은 사진이랄까.

얼마 전에 친구가 재밌게 봤다고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내줬다. 제목은 '백예린 인스타처럼 사진찍는 법.jpg' 이었는데, 그건 "와, 이거 언제 다 치우지?"라는 걱정이 먼저 드는 널부러짐 감성이랄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한 번 보고 오는 걸 추천한다.


사람들이 흔히 일기를 감정의 쓰레기통이라고 하는데, 내 일기는 쓰레기통은 아니지만 (어떻게 일기가 쓰레기통일 수가 있어! 너무해...) 그 비스무리한 것쯤 된다. 잡탕밥 같다고 할까나. 일기이면서 가계부면서, 계획표이기도 하고, 암기장이면서, 아이디어 노트면서, 체크리스트이기도 한... 그냥 적고 싶은 걸 다 적는 공간이다. 그래서 정말 만약에 일기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정도의 슬픔에 빠질 것 같다. (소중한 추억이 많아서라기보단, 내 마음을 안정화시켜줬던 무수한 기록과 정리들의 상실 때문에)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주워서 이 잡다한 기록들을 본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다.


* 소지품 상실 시 데미지 정도

  에어팟 < 지갑 < 50만원 <<< 일기장 = 핸드폰



얼마 전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 각자의 스트레스 해소법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스위치를 오프하고 잠자는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연애라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커피 드립과 홈베이킹이라고 하기도 했고, 그 질문을 한 누군가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서... 그래서 너희에게 물어본 거야"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일기쓰기"라고 대답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할 게 너무 많은 상황에서 우선순위나 중요도가 정리되지 않고 머릿속에 뒤죽박죽일 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서 열등감에 시달릴 때. 이 두 순간 모두 '일기쓰기'는 좋은 해결책이 되어 준다. 머릿속에는 소다라도 들어있는지 어떤 생각이든 (그게 걱정일 때는 더욱더) 조금씩 부푸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내 하나하나씩 일기장에 적어보기 시작하면, 막상 그 실체가 생각보다는 작을 때가 많았다. 열등감도 마찬가지. 결국 열등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 그동안의 내가 아무 노력을 안해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불안감이 해소가 될 때가 많았다.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였어'라고 합리화하는 게 도움이 됐다.


30대가 된지도 벌써 몇년이 흘러서 이제 친구들은 하나 둘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가정을 꾸린다. 그러면 그 차를 얻어타고 즐겁게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친구네 새 아파트에 가서 신나게 술을 진탕 먹고 나서, 한박자 늦게 불안함을 느낀다. 기쁨과 축하의 감정이 지나간 뒤에야 서서히 불안이 드러난 거겠지. 그러면 일기장을 들고 카페에 가서 나의 현재를 재단하기 시작한다. 그 기록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어떻게보면 아프기도 한데, 잠깐의 아픔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은 덤덤하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기운이 생겨. 그래서 내가 일기(라고 쓰고 정리라고 생각하는)쓰는 순간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아무래도 내가 경제력이 없는 것 같아서, 또래들보다 재테크 능력이라든지 경제적인 안목이 부족한 것 같아 불안하니까, 가계부를 쓰는 데 힘을 준다. 번 돈, 쓴 돈, 저금한 돈 등등. 내가 수입이 이만큼인데, 이만큼 모은 거면, 그래도 한달에 이정도씩 저축을 한 셈이니까, 그건 내 월급의 몇 퍼센트고, 나는 꽤 괜찮게 잘 살아온 거야, 잘 해온 거야, 하고.


내가 정리하는 나의 자산에는 빌려준 돈도 포함되어 있다.

- 전세금 000원

- OO통장 000원, 청약통장 000원

- 주식 000원

- 엄마 빌려준 돈 000원

- 이모 빌려준 돈 000원


엄마와 이모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사실 받을 생각을 하고 빌려준 건 아니다. 돌려받지 못한 채로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나는 계속 그 금액을 나의 자산 목록에 포함시켜놓는다. 돌려받을 생각도 없고, 돌려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포함시켜 놓는 이유는, 결국 나 때문에. 내 삶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 돈을 모으기 위해 보낸 시간들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뒤쳐진다는 생각이 들 때, 그 간격만큼의 이유가 여기 있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증명. 그런 증명을 위해 일기를 쓰는 게 아닐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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