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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06. 2021

아, 이번 생을 다시 리셋하고 싶어

리셋 증후군

리셋증후군[reset syndrome]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도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심리적 압박감이 가중될 경우 현실 상황을 온라인 상황으로 착각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강준만, 선샤인 지식노트)




살면서 리셋하고 싶은 순간이 많아서, 그냥 가볍게 농담처럼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원을 찾아보니까 그 내용이 꽤나 심각했다. (이 용어는 1990년 일본에서 처음 생겨났고, 1997년 5월 일본 고베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인 중학생(14세)이 컴퓨터 게임광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냥 웃으며 쓸 말은 아닌 것이다.


회사에는 나와 한 달 차이를 두고 우리 부서로 온 동료가 있다. (내가 먼저, 동료가 후에. 나는 부서를 이동했고, 동료는 경력직으로 이직했다. 나도 이 회사를 이제 고작 1년 넘게 다녔으니 뭐 별 차이는 없다만.) 나랑은 업무적으로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서 사이좋게 지내는데, 다른 팀원들, 주로 상사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다. 소문이란 게 얼마나 빠른지...  한번은 동료가 회사를 관두고 싶다며 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이미 한번 인식이 안 좋게 박혀서, 지금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될 것 같아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라 덤덤한 응원을 보냈지만, 나도 이만큼의 나이를 살아오면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료는 그냥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을 알아서 "그래도 조금 더 같이 버텨요"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6년의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짧게 다닌 회사까지 모두 포함하면 이번에 네 번째 회사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한 곳에 오래 있고 싶은데... 그게 내 생각대로 안된다. 도저히 못견디겠어서 나온 곳도 있고, 망할 때까지 그 회사와 동료들과 만수무강하고 싶었는데 '정말 망하게 돼서' 나온 곳도 있다. 부끄럽지만, 회사를 관두던 순간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게 사실이다. 잘못끼워졌다고 느껴지는 단추를 다시 풀어서 채우기엔 너무 고생스러울 것 같아서, 볼 꼴 못볼 꼴을 다 겪어야할 것 같아서, 일단 '리셋'이라는 이름으로 도망치고 본다. 그때는 최선이었겠지만, 이건 살짝은 부끄러운 최선이다. 



군대도 아니고(요즘엔 군대도 그러면 안 된다), 사실 회사라는 것이 내가 일을 죽어라 못하지 않는 이상, 나에게 심각하게 태글을 거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성격이 모난 사람이나 조금 사회성이 부족한 베베꼬인 사람들이 태클을 건다. 괜히 신경을 긁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늘 도망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회사에서 영부인(회사는 부부가 공동대표다. 대표님 사모님을 나는 그냥 혼자서 영부인이라고 부른다)이 자기 분을 못이기고 괜히 가만히 있는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마음에 안드는 게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냥 그 자리에 있다가 불똥이 튄 느낌이다. 겪기 전에는 소문에 휩쓸리지 말자고 다짐하는 편인데, 왜 그토록 사람들이 가족회사는 거르라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하지만 내 얼굴에 침뱉는 것 같아서 잡플래닛에 욕도 못하겠다. 그건 싫잖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부인의 짜증을 한껏 받아내고 나면 머릿속엔 현타가 가득 찬다. 사실 도망도 가고 싶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기도 하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자꾸 내가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게 정말 싫어서 어떻게든 있어본다. 그러려니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연습도 한다. 리셋 버튼을 눌른다고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판이 시작되는 건 아니니까. 다시 노력이 반복되고, 수십 번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할 거다. 이 사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 아까우니까. 도망가는 대신 무시하고 싫어하는 방법을 택해보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언제든 그만할 자세는 제대로 장착한 채로. 


가능하면, 리셋 버튼은 최대한 덜 누르고 싶다. 깨끗이 지워지는 건 없으니까. 수정테이프 위에 다시 수정테이프를 덧씌우는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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