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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Jul 10. 2021

녹슨 유리병과 최신의 딸기잼

여유 없음이 알려준 무던함을 들킨 걸까 봐

오래된 집에서 나는 냄새

사람 사는 냄새 같으면서도

퀘퀘한 냄새


새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엄마 집과 가까워졌다. 버스로 30분. 오늘은 야근을 해서 다음에 가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냥 늦게라도 오늘 오라고 했다. 파김치며 오이소박이며 멸치볶음과 내가 좋아하는 진미채볶음, 그리고 꼬막무침까지 이미 다 싸놓았다고. 잠깐 와서 가져가기만 하라고.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엄마 집이 조금 낯설었다. 엄마네 집은 엄청 오래된 다세대 주택인데 계단 위의 센서 등도 고장나 있었다. 문을 열면, 오래된 집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사람 사는 냄새 같으면서도 퀘퀘한 냄새. 지난 달에 집을 구하러 다닐 때 처음 보러 간 집에서 비슷한 냄새가 났던 것 같다. 내가 가진 돈은 너무 적고 (그 집도 전세대출을 엄청 받아야 했다) "여기 이 동네에는 아예 집이 없어요. 그나마 이 돈으로 그 정도 집이면 괜찮은 거예요"라고 공인중개사 아주머니는 말했다. 내가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그 집을 처음 보러 갔을 때, 거기 살 생각을 하니 너무 막막해서 얼른 다른 집을 찾아 계약했던 건데, 오랜 만에 간 엄마 집에서 그 냄새가 났네.


엄마 집에서 재빨리 저녁 밥을 먹고 밑반찬을 한 보따리 챙겨 버스를 타러 나왔다. 엄마집 복도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를 배웅하러 따라 나오는 엄마에게 말했다.

- 여기 계단 불이 안켜져.

- 응, 한참 됐다.


문자도, 카톡도, 알람기능도 안 쓰고 스마트폰으로 하는 거라곤 전화밖에 없는 엄마가 능숙하게 후레시를 켜며 "휴대폰 불빛으로 보면 괜찮아"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 처지가 나는 불안했다.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지 못하는 엄마. 살을 빼라고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절뚝거리며 걷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니 마음이 아프다기 보다는 더 복합적인 감정이다.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속상하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말하는 엄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수가 없어서 막연해진다. 엄마가 챙겨준 밑반찬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손이 무거워서 아주 혼났다. 내가 들기에도 너무 버거운 무게의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 엄마는 돌덩이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닌다. 60살이 다 돼가는데 여전히 나처럼 백팩을 멘다. 그러고도 또 양손에는 홈이 패일만큼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겠지.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버스정류장까지 배웅 나온 엄마를 보며, 지금까지 엄마를 배웅하기 귀찮아했던 내 마음이 겹쳐보였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손에 짐이 많다는 핑계로 엄마에게 얼른 들어가라는 손인사도 하지 못했다. 있잖아. 엄마를 보고 온 날에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진다.


또 얼굴을 안보고 목소리를 덜 듣고 며칠을 지내면 내 일상에는 새로운 걱정이 너무 금세 들어차서 조금 잊을 수 있게 되지만, 이렇게 바로 그날 밤에는 당장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눈 앞의 걱정으로 당겨오는 것이다.



막차가 아닌데도 버스에는 손님이 둘. 나 말고 다른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내리려고 벨을 누르자 기사님이 나보고 그 손님을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는 일어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버스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지난 주말에 아나와 시내가 집들이를 왔는데, 설거지를 하던 시내가 내 후라이팬을 보고 이건 이제 그만 버려야한다고 말했다.코팅이 벗겨지기 시작해서 계속 쓰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했다. 그때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코팅이 벗겨졌다는 걸 알면서 계속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큰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자취생이라서, 살림에 무딘 사람이라서 코팅이 벗겨진 후라이팬 정도야 그냥 무딘 척 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그런 척을 분명 했겠지만, 뭔가 '여유없음이 알려준 무던함'을 들킨 것만 같았는데.


오늘 엄마가 싸준 반찬을 풀다가, 이건 뭐 반찬통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용기들을 마주했다. 멸치볶음이 담긴 건 플라스틱 팝콘통, 엄마가 만든 특제 양념장통은 뚜껑 가장자리가 녹슬어버린 과일잼 유리병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혼자 살다보니 주방살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양념장을 담아놓을 용기는 없고, 그래도 누군가 오면, 또 녹슨 병을 나무랄까봐 조금은 더 최신의 딸기잼 유리병에다 옮겨 놓았다.



별 것 아닌 이런 이야기를 왜 기록해놓는지

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꾸역꾸역 책으로 만들고야 마는지.


그건 내가 나한테 했던 질문이기도 한데, 어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온통 예쁘고 떳떳하고 부러움을 사는 이야기들이 살아남는 시대에, 이건 나만의 인스타그램 같은 것이다. 이런 삶들도 존재한다고 알려주고 싶은가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뒤로 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일 회사에 가서는 비싸고 좋은 것들 얘기를 하겠지. 그것도 잘못은 아니고, 이것도 불행은 아니고. 행복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건 이것 나름대로. 우리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나의 엄마고, 나는 나 나름대로 아들 노릇을 한다. 우리에게 향하는 우리의 역할은 그 어느 것도 잘못이 아니라고.




오랜만에 잼 뚜껑을 열었더니 이제 절반 정도 먹은 딸기잼에 곰팡이가 피었다. 엄마가 만들어 준 딸기잼. 만든 날짜 3월 29일. 두 달도 더 지났으니 상할 때도 됐지. 틈틈이 꺼내 먹었어야 했는데 처음에만 잘 먹다가 이내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게 됐다. 하수구에 잼을 따라 버리니 주방에 온통 달큼한 냄새가 찼다. 오늘 버린 딸기잼도 어떤 사랑인가. 누군가는 넘치게 주고, 받는 사람은 처음에는 좋았다가 맛있게 먹었다가 나중에는 짐이 됐다가 상해버린 것을 버릴 때는 괜히 속상하다. 제때제때 챙겨먹지 못한 나도 별로고, 애초부터 넘치게 준 누군가가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도 마지막에 남는 건 달큼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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