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부 Jul 29. 2021

우리 둘의 요가시간

나른한 오후 느지막이, 할머니와 함께 내가 본 것들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할머니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꿈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이윽고 흐릿한 시야에 검버섯이 핀 부은 발목이 보였다. 그래, 이게 우리 할머니 다리. 역시나, 아까는 잠결에 잘못 본 거였구나. 나는 고개를 젖힌 채로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고 할머니는 베란다에서 화분들을 옮기고 있었다. 눈을 뜬 순간, 마침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화분을 집어 드는 할머니를 보고서는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착각을 했던 거다.     


일어났으면 수박 먹어.

할머니가 베란다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할머니, 나는 아까 할머니가 물구나무선 줄 알았다.

호호. 할머니가 물구나무를 어떻게 서.

그러게. 그래서 난 꿈인가 했지.

 

그런 착각을 한 건 아무래도 낮잠을 자기 전에 본 유튜브 때문인 것 같다. 어떤 할머니 유튜버(밀라논나에 빠져있다)의 브이로그를 봤는데 그분은 자기 전에 잠깐 스트레칭 겸 요가를 하셨다. 바닥에 누워 두 다리를 번쩍 들고는 머리 위로 가뿐하게 넘겼다. 딱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자세를 편안히 유지하면서 말씀하셨다.

가끔씩 물구나무를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대요. 근데 나는 나이 들어서 물구나무를 설 수 없으니까 이렇게 비슷한 요가 자세라도 하는 거야.


그분의 말을 잠깐 빌리자면 이렇다. 우리는 평생 중력의 영향을 받으니까 살면서 신체 기관도 다 아래로 쏠리게 된단다. 아무래도 한쪽으로 쏠리는 건 건강하지 않을 테니까 틈틈이 물구나무를 서면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수박을 먹다 말고 물구나무를 섰다. 남들만큼 팔뚝에 힘이 없어서 소파에 머리를 파묻고 벽에다가 두 다리를 걸쳤다. 얌전히 수박이나 먹을 것이지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고 나무라는 할머니에게는 유튜브에서 본 얘기를 해줬다. 머리로 피가 쏠려서 내 얼굴이 터질 것 같았는지, 할머니는 알겠으니까 얘기도 그만하고 물구나무도 그만 서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무릎 수술을 했다. 인공관절을 넣어서 주방에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다리가 아프다. 수술을 한 이후로는 그렇게 좋아하던 체육센터 수영장도 나가지 못하는데, 나는 그 앞에서 중력 때문에 아래로 쏠린 장기들을 바로잡겠다고 물구나무를 서는 손자라니. 사놓고 묵혀둔 막내 이모의 요가 매트를 주방 바닥의 깔개로 쓰며 거기서 김장도 하고 나물도 다듬는 할머니. 요가 매트 위에서 유연하게 몸을 젖혀내고 싶었던 사람은 어쩌면 이모보다 할머니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일어나 봐.

안방 침대에 가서 우리 요가 하자.


나는 수박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할머니를 끌고 안방으로 갔다. 할머니를 침대에 눕히고 두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할머니의 자세는 꼭 어릴 적 아빠가 태워주던 비행기 자세 같았다. 다리를 천천히 들었다 내렸다 하니 할머니는 허리까지 아주 시원하다고 했다. 할머니의 두 다리를 벽에 걸쳐 놓고 나도 할머니 옆에 누웠다. 아까 본 할머니 유튜버처럼 양다리를 머리 뒤로 쫙 젖히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보람 있는 우리 둘의 요가 시간. 엉터리 수업이지만 그래도 이것도 운동이라고 이마에 살짝 맺힌 땀방울은, 할머니와 내가 함께할 앞으로의 날들을 단 몇 시간이라도 더 늘려줄 증표 같았다. 아직 해는 아파트 꼭대기에 있고 저녁이 되려면 멀었고 다른 가족은 아무도 퇴근하지 않았고 할머니랑 나랑 침대에 누운 채 이대로 한숨 더 자고 일어나도 괜찮을 오후의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수박을 먹고 배가 불렀던 나는 또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할머니는 어느새 베란다에 나가 있다. 베란다에 가꾼 화단을 바라보는 게 요즘 할머니의 낙. 내가 온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화분들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거두지 못한다. 이름 모를 꽃들, 방울토마토, 상추, 기타 등등. 원래도 식물을 좋아했지만, 몇 년 전 우리 집 똘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이후로 베란다가 더욱 무성해졌다.     


할머니, 베란다에서 뭐 해?

할머니 새끼들이 자라는 거 보고 있지.

에이, 그렇게 본다고 자라는 게 보이나.

그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 보인다. 숨 쉬는 거, 물 먹는 거, 싹트고 잎 열리는 거. 잠들고 깨어나고 다시 잠드는 거.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본 듯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하나 생각했다. 한 장소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두고 타임랩스 기능으로 촬영한 풍경들.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고 그사이에 초록 옷을 입었다가 다시 진한 노란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 한 그루. 오래 살았다고 해서 저절로 눈에 타임랩스가 장착되는 건 아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식물이 자라는 게 다 보인다는 할머니의 말은 아마도 진실이겠지.     



베란다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일은

어쩌면 할머니만의

물구나무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력을 따라 뿌리를 내리고 중력을 거슬러 싹을 틔우는 작은 생명의 시작을 응원하는 일. “할머니는 이제 늙어서 운동도 못 해. 수영도 못 해. 그러니까 이 할미가 요가 같은 걸 어떻게 해.”하고 말하면서도 자꾸 한쪽으로 주저앉는 가지에 지지대를 세우고 천장을 향해 자라도록 오래 애를 쓰신다. 나는 그런 할머니 옆에서 가끔씩 물구나무를 선다. 상아색 햇살을 받으며 할머니가 화분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면 당신도 지금 물구나무를 서고 있구나 생각을 한다. 이제 할머니는 다리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손등에도 검버섯이 폈다. 그 손길이 닿는 곳에 생명이 피어나는 걸 보는 일이 언제나 신기하다. 할머니가 나를 만지면 그곳이 잠시 환하게 빛난다. 할머니는 이제 안 아픈 곳이 없는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살면서 당신처럼 건강한 손길을 가질 수 있을까. 초록 잎 무성한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매거진의 이전글 녹슨 유리병과 최신의 딸기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