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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May 23. 2022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원

금방 이뤄질 수 있는 일들은 왜 소원이 되지 못할까



케이크를 사는 순간은 다 떠들석한데, 초에 불을 켜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순간들도 다 시끌벅적한데, 왜 초를 부는 순간만큼은 이다지도 고요할까.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몇 마디를 마음으로 읊조리는 그 순간은 왜 모두 아무말 없이 기다려줄까. 내 기념일도 아닌데, 왜 나는 같이 손을 모으고 같은 마음으로 '후' 하고 동그랗게 말리는 입술 끝을 기다리게 될까.


5월 7일 토요일. 할머니집에 다녀왔다. 어버이날을 기념해 엄마도 이모도 모두 할머니집에 모였다. 평소에 먹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던 딸기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사갔다.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딸기와 아이스크림까지 클리어. 어느덧 어둑어둑 해가 져서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이런 순간이 애매하다. 이제 곧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어버이날이라서 사온 케이크니까 엄마랑 할머니 앞에서 얼른 조촐한 기념식을 해야 하는데. 가족들 중 누구도 어버이날을 신경쓰지 않는 것만 같고... 나만 또 초조해져서는.


주말드라마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 할머니, 엄마. 일루 와봐. 내일 어버이날이니까 우리 케이크 먹어야지.


이번 어버이날에는 특히 이모도 껴줬다. 8살 난 딸 율이가 있지만, 어버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개구지고(?) 나에겐 형제같은 이모. 원래대로였다면 이모도 율이에게 어버이날 축하를 받았겠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전하는 '고맙습니다'나 '사랑해요'라는 인사를 들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율이는 날때부터 몸과 마음이 아파서 8살이 되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아직 엄마나 아빠라는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할머니와 엄마가 소원을 빌고 나서, 초에 불을 한 번 더 붙였다.

- 이모. 이번에는 이모도 소원 빌어.


싫은 소리 못하고, 아쉬운 소리도 못하는 이모. 진지한 순간이나 괜히 민망할 때면 자학 개그를 시전하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던 이모. 그런 이모가 두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율이가 얼른 말을 하게 해달라고.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을 해야 어디에라도 내놓지 않냐고.


율이가 말을 못한다는 것. 자폐 증상이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9살이 돼도, 10살이 돼도 초등학교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 가족에게는 은연 중 금기어였다. 이모와 더 자주 만나는 할머니나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금기였다. 이모가 "그래도 우리 율이 내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들어"라고 하거나 "내년에 8살인데, 학교에 갈 수 있겠지?"라고 묻거나, "같은 병원에 다니는 누구누구도 8살이 다 돼서야 말했대"라고 할 때마다 나는 모든 걸 다 알면서도 "그럼"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내가 계속 말을 걸어도 아무 응답하지 않은 율이를 보며, 나에게 집에서는 자주 '엄마'나 '아빠'라고 말 한다고 했던 이모. 





왜 금세 이뤄질 것 같은 일들은 

소원으로 빌지 않는 걸까?  

소원으로 빌지 않아도 이뤄질 것 같으니까?

왜 금방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은 

소원이 되지 못하는 걸까?


따지고 보면 나도 생일 초 앞에서는 이뤄질법 한 소원들을 빌지 않았다.  


- 좋은 회사에 가게 해주세요.  

-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해주세요.  

-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 행복하게 해주세요.


포기할 수는 없지만, 내 뜻과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우리는 소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지쳤던 건지도 모른다. 참고 또 참으면, 계속 견디면 내 뜻과 의지대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7번의 어버이날을 지나왔던 건지도. 이 소원을 빌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꿈꾸고 기대하고, 그만큼 실망하고 무너졌을지 생각이 들어 초가 녹는 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다섯 명이 작은 케이크 하나를 다 못 먹었다. 케이크가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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