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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Feb 06. 2022

가난의 흡착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은 상대방도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열두 살 때 우리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목화아파트. 2층이었다. 목화아파트 210호. 수업이 끝나고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니, 아파트 입구 1층에서 보기에도 한쪽 벽면이 거뭇거뭇 그을려 있었다. 어느 집에서 불이난 건가?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글쎄 우리 집.


헐레벌떡 집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 형광등은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마치 정전이 된 것처럼 사방이 새카맸다. 그리고 형은 얼굴과 옷 곳곳에 그을음을 묻힌 채로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었다. 형은 덜 마른 옷을 다리미로 말려 입으려고 했는데, 그만 다리미를 꽂아둔 걸 까먹고 외출을 한 것이다. 요즘 전자기기들은 알아서 전력을 차단해준다는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나 보다. 그래서 다리미가 펑.


집을 태운 것은 아니었지만, 다리미와 그 주변이 몽땅 타면서 생긴 그을음이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온통 채웠다. 벽은 물론, 이불, 옷, 가구 등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에 연기가 가라앉아, 엄마 형 나 온 가족이 밤새 걸레로 닦고 또 닦아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흡착'돼버린 거였다. 우리 가족은 그 깜깜한 (불을 켜도 어쩔 수 없이 깜깜했다.) 집에서 몇 달을 살았다. 집을 원상 복구시키려면 생각보다 꽤 많은 돈이 필요했던 거다. 아마도 전세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살았던 것 같다. 엄청 큰 소방차가 오고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을 왔으므로 집주인은 우리 가족 보고 얼른 집을 원상 복구시키고 전셋집을 빼라고 했지만, 우리 가족은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집을 나온 이후로 우리 가족이 다시 아파트에 살지 못하고, 더 작은 집, 더 낮은 층으로만 이사를 해왔던 걸 보면 작은 전셋돈에서 수리비를 떼어 간 거겠지.



그 당시 친한 친구들과 방과 후에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곤 했는데, 난 친구들 집에 가면서도 언젠가 내 차례가 올까 봐, 우리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오게 될까 봐 언제나 걱정이었다. 늘 그렇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미리 포기해버렸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는 걸 멈춘다거나.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건, 상대방이 해주려고 하기 전에 미리 차단해버린다. 내가 결국 해줄 수 없으니까, 네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게 부끄러우니까 나도 너네 집에 가지 않을게. 내가 너에게 줄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너의 마음도 내가 받지 않을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한 적이 없다, 사주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면 나도 언젠가 그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만큼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가 엄마에게 사랑을 주는 자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보통의 자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그렇지 않아서 요즘 조금 짜증이 난 것 같다. 엄마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걸,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늘 나에게 자녀의 역할을 요구하고 자신은 엄마의 역할을 하지 않는 엄마가 밉다. 내 얼굴 보고서는 말하지 못하면서, 늘 전화 끝에 '미안하'다는 말로 모든 걸 대신하는 게 종종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엄마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키웠는데.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은

이미 그전에 미리

상대에게 요구할 마음조차

품지 못하는 사람으로 키웠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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