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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Mar 07. 2022

연인의 집을 청소하다가

외국 돈을 여러 장 줍게 되었는데요


연인의 집을 자주 청소한다. 상대보다 내가 좀 더 청소를 잘하기도 하고, 원래 청소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맨날 쇼파에 앉아서 넷플릭스만 보면 소화가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청소인 것 같아서. 청소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가 최선인 것 같아서.


며칠 전 연인의 집을 청소하다가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외국돈을 봤다. 동전부터 지폐까지. 책상에도 책꽂이 사이에도, 침실 서랍에도, 어떤 건 주방에 놓인 조미료통 속에도 들어있기도 했다. 우리나라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인데... 싶어 한 군데에 모아뒀다. (종종 외국돈 뿐만 아니라 한국돈이나 상품권도 눈에 띈다.) 다 모아놓고 보니, 115유로, 281달러, 8,975바트... 대강 어림 잡아 계산을 해도 80만 원이 넘는 돈들.


 환전  했어?” 하고 물어보니, “언젠가 ‘ 거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향과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 경비를 정리하고, 가계부를 쓰고, 아껴쓴  /   것을 셈해보며 반성하거나 뿌듯해한다.)   이걸 보고 우리 둘의 형편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코로나 끝나면, 우리 나중에 같이 여행갈  보태자 “ 말을 먼저 해줘서 고마웠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가는 것은  인생에서 굉장히  도전이고 이벤트라는 것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대신 ". 그래, 언젠가 같이 가자."


유로, 달러, 바트... 모아놓고 보니 80만 원쯤.


회사 근처에 여행 관련 컨셉의 북카페가 오픈했다. 어느 날엔 동료들과 길을 걷다가 A가 B에게 물었다. "여행 좋아하세요?" B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들보다 한 걸음 뒤에 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A가 B에게 다시 물었다.


- 그럼 어디어디 가보셨어요?

- 아, 저는 가까운데 위주로 다녔어요.

  일본 몇 번, 동남아 몇 번.


 걸음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원래 A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멀리, 그리고 오래 떠난 것만이 제대로 여행을 다녀온 것인마냥 얘기했기 때문이다. 파리가 어쩌고, 뉴욕이 어쩌고.  가까운 데만 다녔냐는 A 질문에 "저는... 그냥 가까운  좋아서요"라고 대답하는 B에게 조금 미안했다. B 나와 같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대화의 상대였다면 나는 "여유가 없어서요"라고 대답했을 테니까.


다시 연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가 만나던 초창기엔 내가 가계부를 쓴다는 사실을 들키는 게 두려웠다. 내가 너무 작은 금액까지, 너무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는 사람일까 봐. 아니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까 봐. 그러면 내가 너무 없어보이니까. 어제 같은 침대 위에서 잠들면서도 나는 축의금으로 낼 현금을 만들기 위해 여러 통장에 흩어져있는 돈을 한곳에 모았다.


- 안 자고 뭐해? 하고 물어서

- 나 가계부써. 하고 대답했다.

-  가계부 쓰는 거 참 좋아해. 하고 웃길래

- 나 원래 정리하는 거 좋아하잖아. 

  라고 대답하며 나도 웃었다.


나 정리하는 거 정말 좋아해. 너무 작은 것을, 사소한 것을 정리하는 건 아닐까 싶지만. 나이를 먹어도 내가 정리하는 그릇의 크기가 딱 이정도일까 봐 가끔은 많이 막막해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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