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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Apr 19. 2022

냉이무침을 의심하는 일

어떤 애정은 조금 부담스럽다


지난 봄 어느 날.

애인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 아, 엄마가 냉이무침 줬는데. 먹을래?


얼마 전 김치랑 깍두기를 주겠다고 해서 엄마집에 다녀왔다. 조금만 달라고 했는데도 가방이 빵빵했다. 집에와서 풀어보니 김치랑 깍두기는 물론, 냉이무침 한통과 내가 좋아하는 삶은 꼬막도 들어있었다. (반찬 중에서 꼬막을 가장 좋아한다.) 맛있어보여 냉장고에 반찬을 정리하다말고 꼬막을 하나 꺼내먹었다. 맛은 있었는데, 꼬막 껍질이 씹혔다. 기분 탓인가. 흙도 조금 씹히는 것 같고... 열한 시가 다 된 늦은 밤이었지만,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리고 꼬막을 한 번 더 삶았다. 찬물로 여러번 헹구고 조금이라도 붙어있는 이물질도 모두 제거했다.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그날 같이 정리한 냉이무침을 지금 꺼내서 먹는 건데.


나처럼 애인도 자취를 하니까 이런 집반찬이 그리웠는지, 그날 시킨 메인 요리보다 냉이무침에 젓가락이 더 많이 갔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애인이 "어?" 하면서 씹던 걸 밷었다. 냉이무침 사이에 수세미 심이 하나 들어있었다. "흙 닦으면서 들어갔나보다." 애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수세미 심을 휴지에 싸서 버리고는 다시 밥을 먹었다. 먹다가 이물질이 나왔으면 그 반찬을 안 먹을 법도 한데, 아랑곳 없이 냉이무침을 먹었다. (나를 위해서였나?) 


사실 나는 냉이무침이 그렇게  맛있지는 않아서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수세미가 나오고 나서부터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혹시 또 수세미가 나올지 모르니까. 한 번은 괜찮은데, 두 번 나오면 좀 그러니까. 애인의 입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는 내 입에서 발견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히 그날의 식탁에서는 더는 어떤 이물질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혼자서 저녁을 먹으며 남겨놨던 냉이무침을 다 먹어버리기로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버리고 싶었는데, 엄마가 준 거니까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 의식적으로 계속 냉이무침을 먹었다. 냉이무침을 먹으면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의심하게 됐다. 또 수세미가 나올지 몰라. 음식을 씹는 내내 긴장이 됐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수세미 심이 하나 더 나왔다. 식사가 끝나고 큰일을 하나 치룬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사랑은 조금 부담스럽다.

분명 애정인데, 애정인 게 확실한데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건 

미안하고 찝찝한 기분이 든다.


집에 가서 먹으라고 챙겨준 사과봉지를 풀었는데, 전구알처럼 작은 사과의 구석구석에 멍이 들어 있을 때. 냉동실에 얼려놓고 틈틈이 끓여먹으라던 김치찌개에 고기보다 비계덩어리가 더 많이 씹힐 때. 쌀밥만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면서 엄마가 챙겨준 찹쌀포대에서 작은 개미가 계속 나와서 밤새 쌀을 휘저으며 개미를 잡아 죽였을 때.


나는 결국 이 모든 것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걸까. 엄마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서. 내가 찾는 기성품의 삶, 내가 꿈꾸는 정제된 삶이 나 혼자서만 누려도 되는 것일까. 어떤 애정은 부담스럽고, 불안하고, 그래서 나는 자꾸 의심했었다. 그럴 때면 늘 미안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표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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