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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Jul 10. 2021

눈빛

내 편이었던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면


내 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가 있니?


엄마나 아빠, 그러니까 가족같이 

오랜 시간을 함께  사람.

믿지 않고 의심하는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는.


어제 점심시간에 한 선배와 함께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어.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선배가 아는 사람을 만났어. 선배가 관리하던 도급업체의 직원이었대. 얼마 전에 다른 회사에 합격하게 되었다고 사표를 제출했는데 아마 잘 안됐나 봐. 선배가 식당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때 눈을 마주친 그 사람 눈빛이 좀 흔들렸거든.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자리로 돌아온 선배가 나에게 말해줬어. 저 사람 참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다른 회사의 면접에 합격하지도 않은 상태로 일부터 먼저 그만둬버린 거야. 선배한테는 이미 합격한 상태라고 거짓말을 했었대. 어차피 일 욕심도 없고, 실적도 안 좋아서 선배도 속으로는 언젠가 관두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 주변에 그런 사람 있잖아. 전형적인 사람 좋은 사람. 판매사원이니까 제품을 많이 팔아야 돈을 많이 버는 건데, 제품은 많이 못 팔고 매장에서 시키는 일들만 열심히 했었대. 무거운 짐 같은 거 다 옮기고, 청소 열심히 하고, 뒤치다꺼리만 군말 없이 하는 거.


선배랑 밥 먹으면서 그냥 그 사람 얘기를 잠깐 했을 뿐인데, 갑자기 배가 확 불러오는 거 있지.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더부룩해지는 거야. 그 사람이 선배를 쳐다보던 눈빛이 자꾸 생각이 나서.


있지. 난 그 눈빛을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아니 사실은 몇 번이 아니라 자주. 자주 보다 더 자주.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눈빛.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는 눈빛. 들킬 걸 알면서도 속아주길 바라며 건네는 눈빛들 말이야. 너무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에게서 그 눈빛을 발견하게 되면 그게 참 미웠어. 어린 나이에도 서러운 기분이 들었어.


난 어릴 때 용돈을 받으면 늘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았어. 그런데 한 번도 그 저금통을 들고 은행에 간 적은 없었지. 어느 정도 돈이 모일 만큼의 시간이 흐르기 전에 누군가가 늘 내 저금통에 손을 댔거든. 돈만 조금씩 사라지기도 하고, 언젠가는 저금통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어. 그럴 때는 그 저금통을 가져간 사람도 함께 사라져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 저금통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도 최선을 다해 저금통을 꽁꽁 숨겨놓았는데 언제나 저금통은 사라지고 말았어. 어쩌면 무언가를 숨겨놓기에 우리 집은 너무 작았나 봐.


내 저금통을 가져가는 사람이 형이라는 것을 우리 가족은 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어. 엄마와 함께 집 나간 형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 미운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왜 또 기다렸는지. 나는 미워라도 할 수 있었지, 아마 엄마는 나보다 좀 더 힘들었을 거야. 무얼 할 수 없는 입장에서 무어라도 해야만 했을 테니까.



매번 형이 저금통을 

가져간다는  알면서도 

나는 늘 저금통에 용돈을 모았어.


형이 가져간 내 돈은 늘 엄마가 다시 물어줬어. 엄마도 한 번에 감당하기 어려운 큰 금액일 때는 절반만 물어주기도 했지. 나머지는 나중에, 나중에 꼭 준다고 약속했어.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왜냐하면 엄마는 물어줘야 할 게 내 저금통에 든 돈 말고도 많이 있었거든. 형이 가게에 외상으로 달아놓은 음식값이라든지, 돌아다니며 흔적처럼 남겨둔 크고 작은 사고의 수습에도 돈이 꽤 많이 들었으니까.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까지 사라졌다가 나타난 형은 언제나 꾀죄죄한 모습이었어. 그런 형을 붙들고 나는 늘 저금통의 행방을 물었어. 내 저금통을 형이 가져간 거 다 안다고. 물어내라고 소리쳤지. 그러면 형은 늘 자기가 아니라고 대답했어. 그러니까 바로 그 대답을 할 때의 눈빛이야. 들킬 걸 알면서도 속아주길 바라며 건네는 눈빛. 사람을 참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그 눈빛.


요즘 형은 집을 나가진 않아. 집을 나갈 만큼의 체력도 남아있지 않거든. 그렇게나 거침없었던 사람이 이렇게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니. 아니, 어쩌면 언제나 돌봄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어.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나는 언제나 잘 모르겠어. 잘 모르니까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려. 믿을 수가 없으니까 내 편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버려.


이제는 명절에야 한두 번 보는 사이가 되어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형에게서 변함없이 그 눈빛을 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우리의 과거를 꺼내놓을까 봐 불편해하는 눈빛. 엄마의 입을 빌려 나에게 전해지는 형의 부탁을, 내가 거절할까 봐 불안해하는 눈빛. 지금 이 순간만을 어떻게든 모면해보려는 그 눈빛들을.


그 눈빛이 지겨우면서도 나는, 형이 나 말고, 엄마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눈빛을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참 못됐지. 그 눈빛을 지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스스로 살아갔으면 싶은 마음이 들어서. 들킬 걸 알면서도 속아주길 바라는 눈빛을 내비치는 형이 있고, 또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눈빛에 응해주는 사람들이 형 주변에 있었으면 해서. 나도 이제 그만. 엄마도 이제 그만. 이제는 형이 우리 편이 되어주었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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