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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05. 2022

긴 꿈에 검은 비

어머니가 수박을 사 오셨다


긴 꿈에 검은 비




어머니가 수박을 사 오셨다


- 일 끝나고 오는 길에

  오늘만 온다는 트럭

  수박 한 통을 오천 원에 팔고 있더라


어머니가 일하는 집은 버스로 한 시간이 걸렸다

정류장에 마중 나간 형제는

수박을 한 통씩 유산처럼 물려받고

끝없는 언덕길을 끙끙 울며 올랐다


어머니도 살짝 울었다고 했다

어깨에 건 핸드백이 자꾸 흘러내리는데

이미 양손엔 수박이 한 통씩

포기하면 아스러질 붉은 속살들이 눈에 밟혀 

손가락 마디가 빨갛게 패는 동안

이 악물고 버텼다

버스 떠날까 뛰는 길에 눈물이 찔끔 났다


- 미련 곰탱이

  새벽에 화장실이나 들락날락 거리지

할머니는 수박 대신 욕을 한입 물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미련 곰탱이가 자른 수박을

형제가 나눠 먹었다

맞이는 수박씨를 삼키고

막내는 뱉었다


어머니는 수박을 먹지 않았다

- 나는 수박을 먹으면 배탈이 난단다

그럴 때면 형제는

할머니보다 어머니가 더 미워졌다


새벽달 얇은 빛을 따라

화장실에 다녀오던 막내는

주방에 들러 쟁반에 남은 수박씨를

제 손바닥에 심었다

대문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의 화단 위로 손바닥을 털었다

씨앗마다의 소원 하나가


두두두 

쏟아졌다


긴 꿈에 검은 비가 내렸다





과일을 먹고 나면 그 씨앗을 화단 위에 뿌렸다. 조그만 베란다에는 할머니가 가져온 이름 모를 화분들이 많았는데 그 화분들 사이로 스티로폼 박스가 대여섯 개 놓여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거기에 흙을 담고서는 할머니는 수박씨, 복숭아씨, 자두씨, 체리씨를 뿌렸다. “할머니, 그런다고 싹이 나나?” 내가 물으면 할머니가 대답했다. “내가 죽기 전에 뭐라도 틔우겠지.” 그럼 나는 할머니의 나이를 되감아보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는 아무거나 먹다가 뒷마당에 던지면, 깜빡 잊고 있던 사이에 싹이 트고 열매가 맺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집 작은 베란다에 수박이 덩굴째 열리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복숭아와 자두와 체리가 또 열리면 아파트가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우리 집 베란다로 동네 모든 새들이 날아들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과일을 먹고 나면 그 씨앗을 화단 위에 뿌렸다. 이따금씩 주전자로 물을 주며 그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일어났으면 좋겠을 소원들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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