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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27. 2022

칵테일은 한 잔에 얼마?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눈치가 보여


새롭게 가까워진 사람들과 술집에 갔을 때, 서로의 주량을 몰라 조금 헤맸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이 맥주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살짝 당황했다. 분명히 나와 함께 호기롭게 맥주를 시켰는데. 세 시간 동안 수다를 떨면서, 간간이 목을 축이기는 했지만, 잔에 담긴 맥주의 높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목이 타서 맥주를 이미 두 잔이나 비워버린 뒤였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각자 마신만큼 계산하는 게 아니라 1/n을 할까 봐. 그러면 나만 너무 마시는 걸까 봐 조금 눈치가 보였다.


사는 형편을 다 아는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그날 술자리에서 얼마의 돈을 쓰게 될지 대충 예상이 된다. 우리 오늘은 이거 먹고 저거 마시자. 평소의 우리보다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말은 안 해도 각자 눈치를 챘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균의 범주에서 계산기 속 숫자가 조금씩 올라가면 모두가 알아서 조절을 했다. 기똥차게 맛있는 것들을 먹지는 못하는 사이였지만, 그 익숙한 편안함이 주는 행복이 있었다. 익숙한 편안함은 그날의 메뉴를 조금 더 맛있게, 그날 마신 술을 조금씩 더 달게 만들기도 했다. 만나면 취하는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었는지도.


사회에 나와서 가까워진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되면, 그 사람 어느 학교 나왔대? 회사 어디 다닌대? 그래서 사는 동네가 어디래? 같은 질문들을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다음날 카카오톡으로 송금해야 하는 금액이 달라지고는 했다.


한번은 친구가 "뭐가 먹고 싶어?"라고 물어서 생선구이가 먹고 싶다고 나는 대답했다. 간단히 밥만 먹자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고등어구이 한 조각에 이만 원을 하는 식당에 가게 될 줄은 몰랐었다. 여기 얼만데? 라고 먼저 묻기에도 조금은 민망하고, 거긴 너무 비싸니까 우리 다른 데 가자고 말할 용기는 여전히 없는 사이. 사람이 뭐 그리 소심해? 라고 말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게 내 모습이라는 걸 이십 대 후반부터는 스스로 인정하게 됐다. 나도 이런 내 소심함이 가끔은 치가 떨리는데 이게 진짠 걸. 사실 내 모습인걸.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계속 여전할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언젠가 찾아왔다.


물론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들을 상대에게 꺼내 놓는다고 해서 나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쪼잔한 놈이라고 핀잔을 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망설이게 되는 건, 뭔가 지금의 이 평화롭고 평등한 관계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는 시작점이 될까 봐. 나는 그게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사람들을 만날 때는 나도 조금은 더 여유롭고 싶고 나의 솔직한 형편에 연연하지 않는 무탈한 분위기에 흠뻑 취하고 싶어서 일지도.


내 입으로 친구들에게 '야, 나 돈 없어', '나 요즘 가난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일순간 망설이는 눈빛에서, 주춤거리는 행동에서 친구들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라서 나는 숨어 버릴지도 몰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역시다. 연애를 하면서 '아무래도 그건 너무 비싼 것 같다'라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터무니없이 비싼 것들에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에게만 비싸게 느껴지는 건지 아닌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들 앞에서는. 말을 꺼냈어야 하는데 결국 꺼내지 못했다. 그 말을 꺼내기는 여전히 어렵다.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만난 친구들 중에 가장 가깝게 지내는 무리가 있다. 따로 또 같이, 못해도 한 달에 서 너 번은 만나는 사이인데 만난 지 2년 가까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조금씩 그런 말을 한다. 나 요즘에 돈을 조금 많이 썼어. 그러니까 술은 그냥 소주로 마시자. (그냥 안 마시면 될 텐데...)


평일 밤. 내일의 출근이 두려워서 우리는 또 밤거리로 모였다. 누군가 만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한 요즘. '다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우리 오늘은 칵테일로 마실까?' 친구의 제안에 머리를 좀 굴리다가 또 마냥 좋다고 따라간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사람들 만나려고 돈도 버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앞에 놓인 것이면 무엇이든 너무 빨리 마셔버리는 나의 속도를 민망해했다. 한 잔을 더 마셔도, 한 잔을 또 더 마셔도 괜찮아. 잔에 얼음만 덩그러니 남아도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이런 고민을 오늘 모인 넷 중에 나 혼자만 하는 걸까 봐. 속상해져서 또 날름 잔을 비웠다. 그런 슬픈 마음이 잔에도 자꾸 차서. 누가 보기 전에 서둘러 비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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