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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Oct 30. 2022

밥풀 편지

식탁에 밥풀로 붙여놓은 편지들이 모여서


연인의 어머니는 내년에 팔순이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내년에 팔순이다.


애인은 늦둥이고, 우리 할머니는 결혼을 빨리했고, 첫째인 우리 엄마도 결혼을 빨리했다. 나랑 애인은 나이가 비슷하지만 그래서 서로의 엄마들은 스무살 넘게 차이가 난다. 애인의 엄마와 우리 할머니의 연세가 같은 게 가끔 신기하고 놀랍다.


사실 가장 신기한 건 애인이 부모님과 카톡을 하는 걸 볼 때다. 긴 문장도 척척 타이핑하고 귀여운 이모티콘도 쓴다. 아버지는 열심히 블로그도 하신다. 주식 정보방에서 봤다며 소식도 전해주신다. 나도 하기 어려운 건데, 스마트폰으로 주식도 척척 사고 팔고, 저번엔 수익이 조금 났다며 애인 차를 바꿔주시겠다고 했단다.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면, 그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신 건지 새삼 느껴진다.


할머니는 글자를 모르신다. 몇 년 전 교회에서 운영하는 실버스쿨에서 한글 초급반 과정을 들어서 이제 자기 이름 석자는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니 나에게 카카오톡을 보내는 할머니를 상상하면 어딘가 어색한 것이다.


할머니 얼굴에는 흐릿한 상처 자국이 많이 있다. 수두 자국처럼 작은 홈이 많이 패였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마 어릴 때 전염병을 앓았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할머니였으므로 학창시절 내내 졸업식에 할머니를 모셔갔고, 대학교 졸업식에도 할머니께 학사모를 씌우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취업을 했을 때 신입사원 환영회에 부모님을 모셔오는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할머니와 함께 갔다. 지금까지 뒷바라지해준 부모님의 고생에 감사하는 자리니까 거기엔 할머니가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이 할머니 얼굴의 상처를 이상하게 보는 줄 몰랐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오랜시간이 지나서 당연해진 일에는 어떤 의문도 품지 않게 된다. 그냥 그건 당연한 거야, 라고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평생동안 나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지 않은 것도, 성경책 말고는 책을 하나도 읽지 않는 것도, 용돈은 늘 현금으로만 달라고 하는 것도... 번거롭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 그러려니. 엄마니까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어.



엄마도 스마트폰을 쓰니까 가족 카톡방에 속해있다. 이모와 내가 카톡을 하면,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도 카톡 봤어!"


그 말은 카톡으로 무슨 얘기를 했냐는 질문이다. 카톡 카톡 소리는 들리는데... 짧은 문장은 내용도 알겠는데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니까 나에게 전화를 하고 보는 것이다. 엄마는 소외되기 싫으니까. 그럼 너무 외롭고 무서우니까.


나는 카톡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사소한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가끔은 말끝을 흐리고는 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사소한 일이야."


맞다.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일이면 전화를 했을 테니까. 그래, 사소한 일인데, 그 사소한 일을 엄마만 알지 못해서. 나는 왜 이런 거에 화가 나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걸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직장생활을 하던 엄마는 밥상에 나와 형의 저녁을 차려 놓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종이에 짧은 메모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건 엄마의 편지. 맞춤법이 다 틀린 편지를 적어 밥상이나 냉장고 문에 붙여놓았다. 뒤에 밥풀을 발라서 꾹꾹.


학교가 끝나고 빈집에 들어올 때, 형은 친구들과 다니느라 밤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엄마의 퇴근도 늦고... 빈집에 나 혼자일 때도 무섭지 않았다. 편지를 읽고 읽다 보면 나를 챙겨줄 사람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으니까.


"엄마, 글씨도 안 쓰면 자꾸 줄어?"

"글쎄. 요즘엔 눈도 침침하구 잘 안보여서."


나는 우리가 같이 뭐라도 쓰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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