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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부 Jul 29. 2021

철봉 냄새

비릿한 맛이 좋아서 몰래 혀로 맛을 보곤 했다


철봉을 하면

손에 비릿한 쇠의 냄새가 밴다

      

어릴 적에, 지금보다 몸도 마음도 그 무게가 조금은 더 가벼웠을 때 나는 철봉과 가까웠다. 움켜쥔 주먹의 손금 사이마다 검은 때가 낄 때까지 철봉에 매달려 있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 혀를 살짝 대고 철봉의 맛을 봤다. 짭짤하고도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숟가락, 젓가락을 입에 넣을 때와는 다른 그 맛이 신기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도 아무도 안보는 순간에는 혀를 낼름- 몇 번 더 반복했던 것 같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까 집에 가기가 싫은 거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같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오락을 하거나 만화책을 빌려 봤다. 그러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학원으로, 집으로 갔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사라지고 혼자가 되면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운동장에 오래 남아 있으면, 하늘 꼭대기에 떠 있던 해가 학교 옥상을 지나 다른 동네로 슬슬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철봉 밑에서 형을 기다렸다. 세 살 많은 형은 딱 그 세 살만큼 학교가 늦게 끝났다. 그럼 난 거기서 또 세 살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렸다. 형이 형의 친구들과 다 놀고 집으로 가야지 마음먹는 시간까지.     



운동장에 있는 놀이기구 중 혼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는 건 사실 많지 않다. 인기가 많은 그네. 하나로는 균형을 맞출 수 없는 시소. 색색의 타이어를 반쯤 박아 경계를 두른 모래사장. 모래사장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그대로 입고 내일 또 학교에 가야 했다. 나는 주로 구름사다리나 정글짐에 걸쳐 앉아 종례 시간에 적은 알림장을 보거나 천자문을 봤다. 어느 날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도 구경했다. 가끔 내가 있는 쪽으로 공이 굴러오면 어쩔 줄 몰라 정글짐 위에서 멀뚱멀뚱 먼 곳만 쳐다봤다. 그러면 짜증이 섞인 야유와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넓은 운동장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철봉이었다. 오금에 철봉을 끼우고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리는 걸 좋아했다. 시야가 뒤집혀서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어지면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몰랐던 걸 알게 되었을 때, 또래 앞에서 얼굴이 벌게져서 그 비밀을 털어놓는 일처럼. 생경한 것들이 주는 착각에 쉽게 빠졌다.     


텅 비어버린 운동장만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 있을까. 움직이지 않는 물체들로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평화롭고 또 무서운 일이었다. 철봉에 열 번 매달렸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할 때, 거꾸로 바라보는 시야에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처음에는 10초 정도였지만 어느새 눈 깜짝할 새로 줄어들 때. 나는 아마도 너무 일찍 불안한 마음을 배워버린 것만 같다.     


어떤 날은 형과 함께, 또 언젠가는 혼자서 집에 돌아갔다. 가끔은 버스정류장으로 엄마를 마중 가기도 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퇴근 시간에 맞춰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불평 없이 기다렸다. 몇 대의 버스를 보내고 나면 약속한 듯이 꼭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어리숙했던 세 식구가 예상할 수 없는 걱정들이 넘쳐나는 시절이었지만, 그만큼 정직하게 서로를 믿었던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손을 씻을 때는

늘 손가락만 비벼 씻었다.

더러운 건 손끝으로만 만진다고

생각을 해서.


손끝만 흐르는 물에 담그면, 그날 가라앉았던 먼지들과 피곤함이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서. 그래서 늘 철봉 냄새는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했지만 미워했던 사람들이 가득하고, 뿌듯했지만 불안하게 철이 들어버린 내 모습이 가득한 유년의 기억처럼. 연약한 두 다리를 걸쳤던 가느다란 기둥이 컴컴한 운동장에 서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단단하고 비릿한 냄새가 금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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