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by 안규민


01

눈앞에 무엇이 보이든, 그것을 파헤쳐 보았는데도 여전히 요소명제들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종합명제입니다. 종합명제는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요소명제들 역시 또 다른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진 종합명제입니다.


02

호텔 레스토랑에서 처음 보는 음식을 앞에 둔 당신에게 세계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음식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누가 만들었는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또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당신이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까지가 세계이자 한계입니다. ‘누가’라는 사실을 말하려면 그 사람이 인생에서 겪었던 사태 전체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 사태 속에는 또 다른 ‘무엇을, 어떻게’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무엇을, 어떻게’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는 끝없는 조건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각과 후각을 통한 인상이 전부일 것인데, 그것은 감각 조건에 대응하는 극히 일부의 사실일 뿐 결코 사물이 아닙니다.


03

당신이 어느 아파트의 3층(종합명제)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집 아래에 2층(요소명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행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층은 당연히 아래층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 2층은 3층의 요소명제가 됩니다. 그러나 2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는지 등등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라면 직접 2층으로 가보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알 수 없는 구성들이 바로 요소명제입니다.


04

알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환영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분석을 거듭해봐도 대상의 정체는 오리무중에 빠지고야 맙니다. 사교성 높은 당신이 아래층에 거주하는 사람과 이웃을 맺어 그의 집을 마음껏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위층에 살던 당신은 드디어 ‘2층’이라는 요소명제를 이루는 요소명제들, 이를테면 욕조, 커튼, 스피커 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명제들은 당신에게 정체가 알려지는 즉시 종합명제로써 나타납니다. 이제 당신은 욕조라는 종합명제, 커튼이라는 종합명제, 스피커라는 종합명제와 마주해야 합니다.


05

우리에게 확인되고 말할 수 있는 명제까지가 알 수 있는 세계의 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의 벽 너머에 펼쳐진 무성한 언어의 숲을 다시금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포기하지 않고 세계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 시켜나가며 볼펜을 이루는 요소명제들의 요소명제들의 요소명제까지 모조리 파악하여 언어의 최종단에 있는 기저를 밝혀낸다면 과연 무엇이 나타날까요?


06

명제의 최종단에 대해서라면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음 그 자체가 기저의 성격입니다. 그러나 굳이 최종단의 기저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의 바로 한 걸음 뒤가 그 알 수 없음으로 도사리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07

당신이 알 수 없는 대상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 우주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스피커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고장 난 스피커를 수리하기 위해 내부를 열어보고 있다면, 아마도 그는 우리보다 스피커를 이루고 있는 더 많은 요소명제들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스피커에 대한 그의 세계는 우리보다 더 확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스피커의 내부 구조는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한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08

스피커의 내부 구조는 관찰자가 언제,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조건에 맞추어 제본된 책을 펼쳐두고서 자신만의 세계를 읽어내고 있으므로,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맥락 이상의 문장은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같은 페이지의 같은 문장을 읽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고, 읽고, 아는 자의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르다는 것은 관찰자의 조건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당신으로부터 숨어 있는 스피커 내부의 구성 장치들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것은 스피커가 존재하기 위해 가정해야 할 부속품들로써, 종합명제를 이루는 요소명제입니다.


09

타인이 바라보는 스피커는 타인만의 상대적인 맥락의 세계에서 존재할 뿐이며, 당신이 바라보는 스피커는 당신만의 상대적인 맥락의 세계에서 존재할 뿐입니다. 스피커의 내부 구조는 각자만의 세계들이 부딪혀 일그러진 상태와 우리가 다시 부딪혀 일그러진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일그러짐만을 볼 수 있습니다.


10

‘나’는 감각과 감정과 생각의 변화로 가득 채워진 관념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그중 감정과 생각은 내부의 것으로 여기면서도 감각의 대상만큼은 외부의 것으로 여기려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 역시 지극히 내부의 반응입니다. [눈앞에 있는 스피커의 내부 구조를 본다]라는 형식의 언어는 감각을 외부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인간의 사유 방식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 수 없는 무언가와의 부딪힘으로 인한 ‘나’의 일그러짐]이라는 사실을 외부로 전가하는 것일 뿐입니다.


11

눈앞에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무언가’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부딪힘으로 인해 일그러진 알 수 없는 어떤 상태이며,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상태와 또 한 번의 부딪힘으로 인해 일그러진 자신의 상태만을 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서 당신에게 관찰되지 못한 스피커의 내부 구조는 세계가 아닙니다.


12

부딪히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일그러진 종합명제, 즉 대상은 이러저러한 조건들의 총체로써 우리의 내부에서 영원히 차연되어 가고 있을 뿐이므로, 우리는 각자에게 나타나는 종합명제만큼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며, 설사 누군가에 의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조건 속을 맴도는 독백의 영역이므로 우리는 이름의 저편에 존재하는 거대한 문장의 구조물을 모두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세계란 개인이 바라보는 문장의 깊이이자 맥락이며, 객관적인 세계의 조감도는 영원히 펼쳐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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