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이름표

by 안규민


01

절대적인 사물이 없다면 가능한 것은 상대적인 사실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검은색 볼펜’이라는 사실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것을 올바로 지목하려면 요소명제를 모두 나열해야만 하는데 인간에게는 볼펜을 이루는 요소명제들을 정확하게 나열할 역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볼펜’이라는 약속된 종합명제를 붙여놓고 믿어버리는 것이 고작인 것입니다. 게다가 볼펜이라는 종합명제를 이루는 플라스틱과 잉크와 스프링 등도 역시 또 다른 요소명제들의 총체인 종합명제에 불과합니다.


02

만약 어떻게든 사물을 가리켜보겠다며 요소명제들을 바닥끝까지 추적해 나간다면, 플라스틱이라는 하나의 종합명제를 이루는 요소명제들만 대략적으로 나열하는 데에도 일반적인 소설책 수천만 권의 분량은 빼곡하게 채워 넣고도 거뜬히 넘길 만큼의 서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기나긴 명제들을 모두 낭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여 모든 요소명제를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종합명제가 사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03

"나는 대만에서 만든 검은색 볼펜을 7년째 사용하고 있다."


…라는 이름의 사물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게다가 ‘검은색’과 ‘볼펜’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별개의 요소명제입니다. 여기에는 검은색 볼펜이라는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이라는 사실과 볼펜이라는 사실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색이 없는 사물과 사물이 없는 색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 두 사실의 총체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물로 여겨 온 것입니다.


04

‘대만’과 ‘7년’ 역시 사물이 아니라 사실로써의 요소명제이므로, 설사 볼펜을 이루는 사실들을 완벽하게 서술했다고 하더라도 사물로 인정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하나의 대상이 가지는 서사의 조건은 무질서 속으로 무한히 변화하고 확장됩니다. 도통 사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검은색’과 ‘7년’ 중 단 한 가지라도 변화하거나 사라진다면 눈앞의 볼펜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분량의 문장을 눈앞에 두고서 ‘검은색 볼펜이 있다’라며 손쉽게 종합명제를 믿어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05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다.”


그는 사실과 언어가 대응하는 관계임을, 세계라는 사실이 언어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직접 사실이 아닌 사물을 가리켜보길 바랍니다. 가리킨 사물에서 사실을 탈락시키면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그 사실 속에 사물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그저 공동체가 합의한 언어 놀이의 질서가 대상에 닿지 못하고 실패하는 모습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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