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격언은 참 기묘한 말입니다. 정말로 아는 만큼만 보인다면 모르는 것은 눈으로 볼 수조차 없다는 말일까요? 말장난 같이 들리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미끄러져 ‘잘못’ 아는 만큼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제법 많은 부분들이 언어로 기록된 허구의 페이지이며,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록되거나 읽히는 만큼의 세계만을 사유하도록 훈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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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검은색 볼펜’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검은색 볼펜이라는 대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일까요? 만약 ‘그렇다’라고 생각했다면 그 지점이 바로 언어의 경계이며 우리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검은색 볼펜’은 존재의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기 때문입니다. 기표(표시되는 기호)와 기의(의미와 관념)는 서로 필연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우리는 모두 가명에 속아 가명 밖의 본명을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볼펜이라는 기표에 부여된 기의는 단지 용도에 따라 집단 내에서 약속된 이름표를 달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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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검은색 볼펜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검은색 볼펜’이라는 말을 지우고 나서도 눈앞의 그것은 여전히 사물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대상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겨울밤 쏟아지는 흰 눈의 결정 속에 ‘흰 눈’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저 녹아내리면 투명해질 어떤 사실이 그곳에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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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이라고 부르는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볼펜이라는 명제는 ‘검은색, 플라스틱, 이음새, 누름단추, 추력관, 추력장치, 잉크, 볼베어링, 심, 스프링 등등’으로 불리는 요소들의 집합으로써 나타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검은색 볼펜을 샀어]라고 말하기는 해도 [플라스틱과 플라스틱의 이음세로 고정된 통로 속에 누름단추와 추력장치가 조립되어 있고 잉크가 주입되어 있으며 볼베어링이 장착된 심이 스프링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샀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름을 가진 사물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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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를 위해 플라스틱과 잉크와 스프링 등 볼펜을 이루는 요소들을 이 책에서는 ‘요소명제’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앞에는 그 요소명제들이 관계하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은 볼펜이 아니라 요소명제들에 의해 벌어지는 사태 혹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명제들의 집합에 약속된 이름을 붙여서 부를 때 그 가명을 일컬어 ‘종합명제’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즉 ‘검은색 볼펜’이라는 종합명제는 한낱 가명이며, 그 가명 자체가 사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볼펜이라는 언어를 지우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플라스틱과 잉크와 스프링 등의 총합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는 반면, 사물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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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볼펜이 언어라는 것은 알겠지만 플라스틱과 잉크와 스프링 등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대상 그 자체는 볼펜이라는 언어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닐까요? 그러나 플라스틱도, 잉크도, 스프링도 개별적으로 놓고서 보면 그것들 역시 또 다른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진 종합명제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종합명제만이 나타납니다. 볼펜이 사물이 아닌 언어라면 플라스틱과 잉크와 스프링 등도 볼펜과 다를 바 없는 언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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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지워내고 나면 과연 어디서부터가 사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경계일까요?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사물을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요소명제들뿐이며, 우리가 사물이라고 느끼는 것은 감각수용체가 받아들이는 인상이 전부인데 그 인상은 도무지 사물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한 대상입니다. 박쥐와 고양이와 우리가 바라보는 볼펜은 색깔도 모양도 위치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보는 볼펜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각 정보를 해석한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감각 정보로 해석된 이미지가 언어형식으로 인식되는 사실이 있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