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 너머의 어떤 순간에 있다.
Julio Cortazar 『La noche boca arriba』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01
언어란 다른 언어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언어가 이것을 저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이원 구조, 즉 대상을 둘로 나누어서 인식하는 분별심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오른쪽이 있으므로 왼쪽이 있고,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는 것처럼, 언어란 어떤 존재를 올바르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와의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자의적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분리의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원성(二元性)
현상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근본 원리로 이루어져 있는 성질.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02
대상에 붙여진 이름과 대상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으므로, 이름은 자의적으로 분별 된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환상의 원인인 언어를 통한 분별 활동은 한 존재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하고서 반쪽짜리 질문으로 미끄러지며 세계를 더듬는 마피아 게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 추측한 맥락을 신뢰하며 역할 놀이(혹은 언어 놀이)에 몰입합니다.
03
‘차tea’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그 단어에 얽혀있는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며, 그 관념에 포섭되는 ‘홍차, 녹차, 레몬차, 커피’ 등의 집합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어로 그려내는 관념에 포섭되는 집합과 그 밖의 여집합으로 분리된 모양을 통해 이해관계를 형성하며, 이해관계들의 전체 지도는 세계라는 관념으로 나타납니다.
04
세계관은 언어라는 칼로 영역을 갈라내어 존재가 걸어갈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주로 한정되고 어긋난 길목에만 표지판을 새웁니다. 그렇게 언어로 지시된 아름다운 길과 아름답지 못한 길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의식의 과잉과 더불어 자기 멸시의 길을 걷도록 재촉합니다. 결국 이 길을 향하는 존재는 자기 본질의 집으로부터 먼 길을 배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언어의 방안에서 상영되는 픽션, 즉 환상 속을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05
자의적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핍과 욕망으로 왜곡된 안경을 쓰고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즉 악은 단순히 선의 결핍이 아니라 본질의 결핍입니다. 본질의 결핍은 언어의 이원 구조가 지시하는 대로 길을 헛돌다 집으로부터 멀리 어긋나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를 제멋대로 갈라낸 덕분에 존재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언어로는 본질을 가리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06
자의적이고 이원적인 언어사용에 올바른 반성이 따르지 않는다면 언어가 삶의 형식을 규정하고 억압하는 감시체제로 작동합니다. 그때의 존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본래의 집을 잃고, 언어로 지어진 구조물의 좁은 창살 사이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07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처럼 언어란 결국 차연差延,différance될 수밖에 없습니다(차연이란, 언어가 가지는 의미의 구조가 이원적 차이를 일으키므로 본질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연쇄적으로 지연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 언어로 가리킨 대상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관념은 고정된 사물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그것은 연쇄적으로 미끄러지는 것들을 주워 억지로 가공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08
언어에 의한 개념적 파악은 사물을 살해합니다. 우리는 단지 언어에 스며있는 관념을 보는 것에 불과하므로, 대상이 존재하고 난 이후에 언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꾸며진 대상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어가 존재를 결핍시키는(미끄러지는) 방식이, 이해관계를 통한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어에 의해 대상이 살해된다는 표현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09
우리는 노자(老子)의 말처럼,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며,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식탁 위의 찻잔을 보고 ‘찻잔스럽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개를 보고 ‘개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이름 속에는 늘 ‘…스러움’이 스며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름에는 여성스러움이, 어른이라는 이름에는 어른스러움이 스며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말해질 수 있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며)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 도덕경 제1장』
10
‘…스러움’속에는 존재의 결핍이 뒤따릅니다. 문제는 인간의 의식이 특정 집합을 가리키는 언어를 고정된 실체로 여기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차’라는 단어에 상응하는 집합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집합으로 포섭되는 대상들에게 본질적이고 공통된 기저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이처럼 언어로 지어낸 개념을 실체로 여기려는 태도는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환상에 한시적으로 붙여둔 가명을 고착화시킵니다. 그렇게 언어가 있는 곳에서는 상대적으로 분별 된 아름다움과 그렇지 못한 것이 각각의 이름표를 달고서 등장합니다.
11
언어의 이원 구조에 걸려든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시대가 요구하는 언어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한껏 꾸며 보이게 되지만 그 꾸밈의 기준은 여지없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타인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은 꾸밈의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언어에 의존하여 꾸며낸 모습을 진정한 자신의 가치로 신뢰해버리는 것에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파란, 여백의 언어』를 쓴 안규민이라고 합니다. 본 연재북은 현재 출간 된 책입니다. 그래서 책의 전문을 올리는 것은 구매하신 독자들께 예의가 아닌 터라 일부 내용만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