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주체
01
시인 이상(李箱)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가리켜 위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조된 자신이 진짜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하며,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라는 시어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까닭은 거울 속을 들여다볼 때마다 자신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보고 있었다는 진실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02
이상은 위조된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에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오감도 시제 15호』에서 그는 ‘내가 자살하지 않으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라며 침울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울이 아니었다면 위조된 자신조차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상반된 생각에 골몰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모든 것이 타인의 언어로 위조된 그림(허상)일지라도, 타인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모순에 대해 생각합니다.
03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는 인연들의 총체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해 원인과 결과로 생성, 지속, 소멸하므로, 스스로 지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짓다가 죽는 사람이 많으며, 우리의 식탁에는 늘 누군가의 죽음이 무력하게 누워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희생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성이 없다면 ‘나’의 주체가 없는 것이므로 나와 남이라는 이름의 구분도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04
세계는 조건에 의존하여 나타나고 사라지므로 거울에 비치는 상狀과 같아서 아무것도 고정된 실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울 속에 아무리 다채로운 대상들이 휘몰아쳐도 그것은 모두 하나의 거울 속에서 그려지고 지워지는 가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지워진 우리는 모두 한 자리에 서 있는 동명의 존재이며, 이원화를 넘어선 관점에서는 ‘나’라고 여겨왔던 대상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나와 남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각혜심(眞覺慧諶)의 선시 『대영』(對影)에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못가에 홀로 앉아
물 밑에 그대를 우연히 만나
묵묵히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그대를 안다고 말하지 않네
그는 우연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웃음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비록 마주한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음이 허상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05
거울은 언제나 비어있습니다. 거울은 어떤 모습도 자기 자신으로(자신의 이미지로)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정된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울에 담긴 이미지들은 그저 허상일 뿐이므로 ‘이것이 거울이다’라고 가리킬 만한 고정된 모습은 없습니다. 하지만 거울의 본래 모습이 늘 이처럼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지어진 대상에만 집착하는 눈으로는 텅 빈 거울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을 드러내는 거울을 보려 하지 않고, 대상 속에서만 거울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본다면, 흐르는 물에 비친 자신과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은 둘이 아닌 하나의 거울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평등한 존재입니다. 만약 대상의 ‘나타나고 사라짐’을 수용하는 거울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존재란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음’의 주어짐일 뿐 고정된 이름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텅 빈 거울 속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말할 수도 없습니다.
06
거울 속의 허상에 대해 아무리 많은 진실을 연구해 본들 결국은 허상을 아는 것이며, 그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세계를 이루는 단 하나의 진실인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세계의 전부를 아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은 세계를 차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허상이 ‘알 수 없음’이라는 인연들에게 빚을 진 자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07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파란색 바탕의 캔버스에 파란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빨간색 바탕의 캔버스에 빨간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도 그림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캔버스의 바탕색과 물감의 색이 서로 같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을 그려낼 그 바탕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빨간색 안경을 쓰고서 빨간색을 볼 수는 없듯, 모든 색깔을 보려면 투명한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을 그릴 바탕 또한 아무런 특징을 가지지 않은 흰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음이 있음’이라는 비논리적이고 무한한 바탕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흰색 또한 다른 색깔들 위로 덧칠되어 나타날 뿐이므로 바탕으로서의 흰색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08
투명한 바탕의 이름은 소위 비어있을 공空에 사이 간間을 써, 텅 빈틈으로 모든 것이 펼쳐지는,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닌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치 물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아 헤매듯이, 우리는 언어의 익숙함에 속아 당연한 실상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허우적대고 있었던 셈입니다.
모든 일은 공간 안에서 피어납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색깔이 존재하려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색깔을 허용하는 공간은 어떤 색깔도 고정적으로 갖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공간은 나타나는 모든 색깔과 모양으로의 관계이자 실재이며,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색깔과 모양을 허용하는 바탕입니다.
일본 조동종의 개조 도겐(道元)은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체 대지에 수만 가지의 현상과 수백 가지의 사물이 있고, 하나의 현상과 하나의 사물 각각에 전체 대지가 있다.”
한 장의 흰 스케치북에 창문과 달을 그려 넣으면 창문과 달은 서로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창문과 달이 의지하는 한 장의 스케치북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한 장의 흰 스케치북에서 온갖 그림이 그려져 나타나지만, 각각의 그림들은 단 한 장의 스케치북을 평등하게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바탕은 늘 바르고 평등합니다.
09
스케치북의 오른쪽 여백과 왼쪽 여백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일 뿐, 여백과 여백은 조금도 차별되지 않습니다. 여백과 여백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은 없음과 없음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차별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차별할 수 있을까요?
한 장의 스케치북에 두 개 이상의 창문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각각의 형태와 색깔 그리고 창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 개의 그림을 나란히 그려 넣으면 늘 경험해왔던 상대적인 세계의 기본 구조가 마련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창문을 두 개 이상의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개의 스케치북에 똑같은 모양의 창문을 동시에 그려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두 개의 창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창문이 여러 바탕에 그려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대상들은 하나의 바탕 위에서 펼쳐집니다. 애초에 두 개의 바탕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탕과 아무것도 없는 바탕이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르다고 할 만한 무언가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없음과 없음에는 ‘다르다’라는 언어가 접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간과 공간이 통째로 단 하나의 지금 여기일 뿐입니다. 이것이 도겐이 말한, 하나의 현상과 사물 각각에 전체 대지가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10
한 장의 스케치북에는 창문이 나타날 수도 있으며, 달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장의 스케치북에 창문과 달을 그려 넣으면 두 대상은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게 되지만, 스케치북은 각각의 형태를 허용하고 있을 뿐 스케치북 자신은 그려진 대상이 아니므로 분리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바탕에는 이곳과 저곳을 헤아릴 상대적인 공간이 없습니다. 또한 창문과 달을 그리는 일에는 시간적 순서가 따르지만, 스케치북은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바탕이지 나타나는 대상이 아니므로 대상이 등장하는 시간에 예속되지 않습니다. 존재의 바탕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헤아릴 상대적인 시간이 없습니다.
창문을 그리는 일과 달을 그리는 일은 하나의 스케치북 위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 두 가지 일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다른 형태는 하나의 스케치북 안에서 나타납니다. 나와 남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시간적 공간적 사태들은 이 바탕의 입장에서는 티끌만큼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텅 빈 바탕은 모든 것이 그려지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아무것도 없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의 이전을 뜻하므로 곧 세계라는 형식의 이전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