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경계는 언어의 이원 구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언어로 고정된 채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로의 분별 이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 가운데 다른 단어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꽃’이라는 단어에만 시선을 집중해 보겠습니다.
‘꽃’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을 때 그 옆으로 나열되어 있는 다른 단어들은 올바로 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어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눈에 보였다는 뜻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는 텅 빈 공책을 보듯 분명히 보이는 단어들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단어들은 모두 빛에 복사되어 두 눈 속으로 차별 없이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흐릿하게만 느껴지며, 보고서도 도저히 이름을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02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년』에서 김춘수의 ‘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꽃은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관념,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꽃이다. 꽃은 인간의 명명 행위 이전에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유추되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이 시는 모든 사물들이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며, 이런 점에 이 시의 시사적 중요성이 있다.”
언어로의 명명으로 나타나는 것은 관념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관념화되기 이전의 몸짓은 감각적 실체라는 것인데, 이것은 감각적 실체가 언어의 이전에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꽃’이라는 단어를 볼 때의 경험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보이는 것 중 특정한 대상에게 ‘보려 함’의 의도를 입힐 때 ‘보임’의 상태에서 ‘보려 함’의 상태가 갈라져 나옵니다. 그리고 반대로 단어를 읽지 못하는 단순한 경험 속에서 단어에 내재해있는 개념과는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적 상태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언어적 분별 작용이 멈추어 있는 곳에서 이름을 모르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03
선 하나를 두고도 분별을 일으키는 자와 단어를 보고도 분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읽지 못하는 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념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관념이 없다면 이름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읽어낸 정보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분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다면 언어도 없을 것이며, 언어가 없다면 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자의 경우인 분별 된 대상으로서의 자신은 조건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분별의 이전은 어떤 조건에도 규정되지 않는 본래면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