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정상

by 안규민


자연과 정상


ChatGPT Image 2025년 5월 21일 오후 05_31_52.png


01

고정된 실체를 지향하는 경계의 언어는 이분법으로 대상화되어 나타나는 결핍의 세계를 좋아하며, 존재의 가능세계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경계의 언어에 걸려든 이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편리, 사상에 반대되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을 언어로 규정하고 호명한 뒤 차별과 격리의 단계를 거쳐 벌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 호명되는 순간부터 상상의 구조물로 지어진 세계관은 존재들에게 실재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죄목은 욕구와 상상력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허상이므로 조금만 파헤쳐 보면 아무런 근거에도 지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02

이름은 요소명제들이 어울리는 한시적인 모습에 특정한 용도를 부여하여 고정시킨 개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름이 그토록 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편리함 때문입니다. 볼펜이라는 이름은 그것을 이루는 많은 부품들로 형성된 집합체에 붙여놓은 가명이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편리하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볼펜이 비록 허상이라 할지라도 볼펜이라는 이름이 유지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가히 실재라고 간주해도 될 만큼 잘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누군가의 편리함이 때로는 누군가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03

우리는 하나의 볼펜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며, 수학 공식을 쓰거나 악보를 그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글, 그림, 수학 공식, 악보에는 각각 나름의 형식이 있고, 이 형식들은 곧 볼펜이 접속한 세계가 됩니다. 그렇게 볼펜은 자신이 접속한 세계의 규칙에 따라 여러 가지의 형식으로 기능합니다. 다만 그중 어느 쪽도 고정적인 볼펜의 세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형식이 없더라도 볼펜은 무한한 종류의 세계 속에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4

미학에서 사유하는 관념은 물리학이 다루는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물리학에서는 미학이 다루는 관념을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물리학의 세계에서 실재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물리학의 세계에서 실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재합니다. 아파트 크기의 사과를 떠올리고서 거기에 ‘아파트 크기의 사과’라고 언명하면 그것은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파트 크기의 사과는 자기 나름의 세계에서 나타난 현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이미지는 상상 속에서 아파트의 크기라는 관념의 사과로써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05

물질이든 관념이든 일단 나타난 것은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형식을 총괄하는 하나의 세계 혹은 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낱낱의 가능세계가 얽혀 있을 뿐입니다. 볼펜의 경우에도 무언가를 찌르거나, 상상 속에서 등장하거나, 조금 무리하면 젓가락으로 쓰이는 등의 세계로도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자연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합리적인 자연이란 있을 수 없으며, 비효율적인 자연도 얼마든지 나름의 형식을 갖추고 세계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keyword
이전 06화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