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by 안규민



경계



01

언어로 그려진 세계의 지도와 그로 인한 경계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가변적이고 상대적으로 규정됩니다. 언어의 경계로 지어진 환경은 인간에게 고정된 실체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읽히고 해석되는 대로의 종합명제인 몸과 마음을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규정되어 정체가 고립된 개인은 언어로 위조된 경계로서, 진실한 ‘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02

‘배’라는 기표는 타는 배, 먹는 배, 신체의 배 등을 모두 나타내므로 배는 그 용도가 파악되었을 때만 기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는 배는 단지 ‘먹는 배’가 아닌 ‘먹는 것도 가능한 배’이며, 이러한 관점으로 대상을 사려 깊게 살펴보면 모든 존재가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타인이 설정해놓은 용도에 따라서만 세계를 경험한다면 배는 오직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는 선물하는 것, 병을 치료하는 것, 향을 내는 것,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 등등의 수많은 가능세계에서 나타날 수 있으므로 우리의 한계가 배의 한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03

존재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유연하게 경험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집단과의 약속에 의해 우리의 세계가 차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언어는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사고의 지도인 동시에, 세계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사고의 잠금장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국어사전이라고 불리는 지도의 허용 범위만큼 세계를 향한 시야를 제한받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에는 자동화된 언어 사고 장치가 장착되어 있으며, 이것은 상대적인 시간, 공간, 모양, 색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며 세계라는 경계를 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경험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전개되어버리는 바람에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내부자의 정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04

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는 이러한 언어적 사고 장치에 관하여, 하나의 선을 그려내는 일에도 한 개인의 내면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분별의 시선이 투영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볼록한 선을 그려달라고 지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모양의 선을 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휘어진 선은 정말로 볼록한 선인가요? 누군가에게 이것은 오목한 선일지도 모릅니다.


05

하나의 휘어진 선은 그 자신도 어디에서부터 볼록이며, 어디에서부터 오목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찾을 수 없는 경계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정답은 ‘찾을 수 없다’입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만드는 것은 언어의 일이며, 언어를 떠나서 실재하는 오목과 볼록은 없습니다. 그저 오목이라는 사실의 세계와 볼록이라는 사실의 세계가 각각의 관점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오목 혹은 볼록이라는 경계의 언어로 대상을 규정지으면 그 경계는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찾을 수 없는 그것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잘못 아는 만큼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잘못’이란 대상을 언어로 규정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렇게 대상에 언어를 부여하고서 고정된 실체로 여기려는 것을 ‘대상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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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화의 언어는 순수한 감각에 분별의 프레임을 덧씌웁니다. 어쩌면 지금껏 이 세계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언어로 규정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07

우리는 늘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으며 살아왔지만,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는 말되 눈으로만 보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눈으로만 보고, 읽지는 마시오.’


‘이 글을 눈으로만 보고 읽지는 마시오’라고 써놓아도 눈으로 글을 보는 순간 ‘이 글을 눈으로만 보고 읽지는 마시오’라고 마음속으로 읽어버리고야 맙니다. 읽고 싶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계적인 작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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