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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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이것과 저것의 비교를 통해서만 세계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의 비교를 포기하는 것은 ‘고정된 가치가 없는 상호이전의 언어형식’이 정지된 상태, 곧 세계의 정지를 뜻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설명이 가리키는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말은 어딘가 이상해 보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언어란 고정된 가치가 없는 상호이전의 형식을 취합니다.
02
고정된 가치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나 진리에 묶여 있지 않으며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것은 앞의 텅 빈 스케치북에 해당하는 특징인 ‘아무런 특징이 없다’는 특징과 같습니다. ‘대상’과 ‘대상을 드러내는 바탕’ 둘 모두 고정된 가치가 없고 실체가 없으므로 아무런 차이점을 갖지 않는다면 그 둘을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볼 여지도 없어집니다. 고정된 가치가 없는 언어는 그 자체로 스케치북과 같이 텅 비어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정지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계를 정지시킨다는 것은 이미 비어있는 거울을 다시 비우려고 거울 속의 상을 붙잡고 닦으려는 망상입니다.
03
텅 빈 대상을 드러내는 바탕으로서의 비어있음이 또다시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언어와 언어 이전의 비어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이것은 세계라는 형식의 한계를 포기하기는커녕 세계의 형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조건들 혹은 요소명제의 입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법을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호이전의 연극, 즉 언어 놀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세계의 형식 그 자체로써 나타나는 존재의 투명성, 즉 언어의 경계에 걸리지 않는 존재의 존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는 언어 이전의 여백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그림을 통해서는 그림 이전의 스케치북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빈 스케치북에 대한 오해는 애초에 스케치북에 그려진 대상들이 저마다 ‘독립적인 실체’라는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흰 스케치북에 검은 점을 찍은 뒤 스케치북을 점점 멀리 떨어뜨리면 언젠가는 검은 점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검은 점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가장 미세한 지점을 시각의 최소단위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최소단위의 점들이 모여 전체 시각을 이루며 선이 되고 모형이 되는 것으로, 사물을 논리정연한 입자들의 총체로 보는 자연과학적 사고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경험 자체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검은 점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커녕 흰 스케치북이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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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스케치북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검은 점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최소단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배경들과의 관계성을 보여줄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라지기 직전의 검은 점을 시각의 최소단위로 여기는 것은 관계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는 대상을 독자적인 단위로 여기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것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착각일 뿐입니다. 세계란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곳이 아니라 전체가 있기에 부분이 가능한 관계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달을 떠올려보겠습니다. 하늘도 구름도 별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오직 달만을 떠올릴 때 달은 진정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달을 떠올리는 순간 달의 이미지는 감은 눈의 검은 배경에 의지합니다. 배경 없이 달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달을 없앨 수는 있지만, 달을 떠올린 배경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배경을 바꿀 수는 있어도 배경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즉 전체가 먼저 주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부분도 주어질 여지를 갖습니다. 부분과 전체는 서로에게 의존하여 현현합니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최소단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일어나는 상호 의존성의 결괏값이 고정된 실체 없이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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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서로에게 의존하여 현현한다는 이해는 각각의 투명성보다 전체의 투명한 관계에 집중하게 합니다. 세계라는 무상한 얽힘에 속한 우리의 투명성이 곧 세계를 나타내는 투명한(혹은 알 수 없는) 요소명제가 되므로, ‘나’는 곧 세계의 무상한 관계 속으로 흘러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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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에서 검은 사각형은 흰 바탕을 등지고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전면의 존재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대상에게만 고정되는 이유는 쫓을 수 있는 것이 대상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쫓을 대상이 없는 곳에서 다른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소모적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시선이 고정되는 대상을 실체로 여기는 것은, 말 그대로 대상을 고정된 실체로 보려는 행위입니다. 라틴어에서 실체(숩스탄티아Substantia)는 ‘견디다’는 뜻의 동사 Substare에 어원을 두며, Stare(서있다) 또한 ‘버티다, 유지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즉 실체에는 대상의 현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견디고 버텨내려는 능동성이 내포되어있습니다. 대상을 쫓아가려는 능동성에는 대상을 하나의 집합에 묶고서 다른 집합과 분리시키려는 자의적인 언어의 분별 조작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특정 집합으로 대상을 묶어왔던 관념을 무너뜨림으로써 분리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여백의 언어는, 대상을 조작하지 않는 정견定見(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보는 것)에 해당합니다.
정견은 ‘정견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구’가 아닌 있는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기에, 자의적으로 대상의 존립을 지속시키려는 능동성을 멈추는 것이 ‘있는 그대로’를 뜻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그림은 대상을 단순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대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관찰하여 의미를 찾게 해주었던 경계를 허무하게 만듭니다. 결국 관찰자는 대상의 뒤에 있던 배경의 입장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힘을 잃은 전면의 대상인 검은 사각형으로부터 눈을 돌려 대상을 드러낸 흰 여백에 집중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은 배경과의 상호작용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흰 배경에 집중하는 우리는 또다시 흰 배경을 드러낸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흰 배경은 이제 자신을 드러낸 배경에 대한 전면으로써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더욱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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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각형은 시각을 통한 인식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감각을 통한 대상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이라는 대상은 어떠한가요? 평생을 들여다봐도 감각을 떠나서 알 수 있는 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에 집중할 때 대상과 배경이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것들이라면, 흐려지는 배경 가운데에는 우리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 즉 검은 사각형에 의해 흰 바탕이 배경으로 밀려나는 동안 ‘나’ 역시 배경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현상학에서 일컫는 범주화되기 이전의 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그림은 사물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 저편의 흐려지고 잊히는 배경들의 입장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대상에 집중하는 즉시 자신을 이루는 자아상의 원인을 알 수 없게 됩니다(‘나’라고 여겨왔던 것도 인식된 대상이기에). 알 수 없기에 그것은 알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지만, 한편으로 세계는 그 의지의 바깥이라는 환경에 의존하여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에 대한 자아상이 무너지고 자성의 결여됨을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