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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Sep 24. 2020

5주 차. 스피치의 진정한 주인공(1)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말하기



"너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말하기 상황이 언제인지 아니?"
대학생 시절,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음, 최악의 말하기 상황이라. 여러분은 어떤 상황이 떠오르세요? 발표 대본 없이 해야 하는 스피치? 영어 면접? 이런 가벼운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교수님께서는 무척 의외지만 바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답을 하셨습니다. '예비군들한테 해야 하는 강의'라고 말이죠.
 
상상해보세요. 요즘에야 조기 퇴소 제도가 생기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예비군복만 입으면 멀쩡하던 사람도 이상해진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세상에서 가장 의욕 없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는 예비군들이라고 답할 겁니다. 근데 그런 예비군들한테 강의를 해야 하다니! 심지어 그 교수님은 저명한 학자셨지만 말주변은 좀 없으셨던 분이었거든요. 강의 시간 동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천 명 가까운 예비군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잤다던 교수님의 말씀에 슬프게도 또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예비군이라는, 아무도 내 스피치를 듣지 않는다는 그런 극한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요. 스피치라는 건 스피처 혼자 말한다고 성립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 말을 듣는 사람인 '청중'이 있어야만 스피치는 비로소 그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스피치의 주인공은 스피처가 아니라 '청중'이라고 보는 게 더 맞습니다. 관객 없는 무대, 관중 없는 프로스포츠 경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좀 더 쉬워지실까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죠. 여러분이 스트레스도 풀 겸 요즘 핫하다는 홍대 클럽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요. DJ가 있어야 할 자리에 피아노가 있고 곧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클럽의 분위기는 어떨까요? 반대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예술의 전당에 갔는데 클래식 공연이 아닌, DJ KOO의 EDM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면요? 두 경우 모두 그들의 실력과 인지도에 상관없이 청중들에게 환영받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청중들이 원한 공연이 아니니까요.
 
스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피처의 스피치 스킬이 뛰어나고 공신력이 넘쳐나고 준비를 완벽하게 했다고 한들, 그 스피치가 청중을 고려해서 실행되지 않는다면 결국 의미 없는 스피치가 됩니다. 스피치는 내가 무엇인가를 말을 통해 전달하기 위해 하는 거잖아요. 근데 전송은 했는데 그걸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안 한 거나 다름없는, 아니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니 안 하느니만 못한 거죠.  
 
그래서 스피치는 '청중'을 중심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주제 선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주제부터 청중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으로 선택해야 하고요. 정해진 주제에서 해야 한다면 내용 구성, 예시, PPT, 말하는 방법 등까지도 내 말을 들을 청중들을 고려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경복대학교 뷰티매니저과에서 처음 한 학기 스피치 강의를 준비할 때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강의 내용 자체는 제가 그동안 공기관이나 다른 대학들에서 했던 것과 다를 게 없었어요. '스피치'를 갖고 워낙 많은 곳에서 다양한 주제로 강의를 했으니까요. 더 솔직히 말하면 아마 해오던 그대로 했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욕심이 났어요. 학생들이 저를 통해 말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제대로 배우고 그들의 말 생활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해오던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뷰티매니저과'에 맞는, 그리고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이 흥미롭게 들을 만한 사례들로 다 바꿔서 했습니다. 정말 작은 한 개념이어도 미용실에서 일어날 만한 상황으로 예를 든다든지, 아니면 이 책에서도 자주 그러는 것처럼 연애 이야기로 푼다든지 하면서 말이죠.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청중들은 결코 방청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잘 받아들이거나,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스피처의 메시지를 들을지 말지부터, 그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할지, 그리고 스피치에서 어떠한 부분들을 기억하고 얻어갈지 등 청중들은 무척 적극적으로 선택해가며 스피치를 듣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저는 이제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지만 강의를 듣던 대학생 때를 떠올려보면요. 교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100% 수용한 적은 없던 것 같아요.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차마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는 무척이나 거센 반박을 하기도 하죠. 때로는 아예 듣지 않기도 하고요. 근데 사실 저는 껏 해야 그 과목을 몇 학기 정도 공부한 학생이고 교수님은 최소 10년 이상을 공부하시고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강의해온, 그 분야의 엄청난 권위자시잖아요. 그럼에도 제가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지 않거나, 다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반박까지 한다는 게 사실 웃기지 않나요? 근데 그렇다는 거죠. 우리 모두가 그런다는 거죠. 그리고 청중들은 그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청중들을 분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피치를 하는 목적은 결국 그 스피치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메시지를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거니까요. 그 메시지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스피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볼까요? 교수님은 예비군들을 위한 특강을 아주 열심히 준비하셨을 겁니다. 분명 강의 내용은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예비군'이라는 청중의 특성을 생각하지 못하신 거죠.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 예비군이라는 존재들은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들을 의욕이 전혀 없는 그들이라 해도 청중 분석이 제대로 됐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자는 참사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만약 제가 그런 예비군들에게 강의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저도 모든 예비군들이 다 잘 듣게 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 반 정도는 제 강의를 듣고 싶게 만들 자신은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헌팅 100% 성공하는 법'으로 시작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자칭꼰대교수의 강의 노트 5-1>


#청중 분석의 중요성
 
1) 스피치의 주인공은 '청중'이다.  
2) 스피치의 목적은 우리의 메시지가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3) 청중들은 스피치를 결코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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