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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Sep 20. 2020

자칭꼰대교수와 특'별난' 제자들의 이야기 넷.

"교수님, 구두끈이 풀려있는 건 스타일인가요?"

제 인생에는 어려서부터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있던(아, 사실 한 순간은 빠졌었네요.) 복(福)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복(女福)이요.(이제 왜 한 순간은 빠졌던 복이라고 했는지는 아시겠죠? 군대!) 이상하게 동네에도 형들보다 누나들이 많았고요. 초등학생 때부터 했던 방송부에도 늘 여자 비율이 한참 더 높았어요. 전공인 국어국문학과에도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이 아무리 잘 봐줘도 7대 3 정도였고요. 아나운서 지망생 때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환영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아나운서 지망생의 성비는 9대 1에 가깝거든요. 
 
그리고 그 복은 끝나지 않아 저는 '뷰티매니저과'에서 스피치를 가르치는 사람이 됐고 저희 과에는 남학생이 단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친구 중 한 친구가 조금 특이했어요. 라고 쓰고 보니 셋 다 특이하긴 했는데 한 명이 유독 좀 더 특이했습니다. 
 
첫 수업을 할 때부터 그 친구는 심상치 않았어요. 맨 뒤에 앉아서는 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모두 평가하는 듯한 레이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아니 째려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수업하는 내내 그 친구랑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내가 남자여서 싫은가?", "원래 반항적인 학생인가?!"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2주 차 자기소개 스피치. 그 친구가 스피치를 하러 앞에 나가는데 제가 은근 긴장되더라고요. "혹시 정말 반항적인 학생이어서 일부러 스피치 막 엉망으로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그 친구의 스피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스피치는 생각보다 무난하고 평범하게 잘하더라고요. 
 
하지만 역시 그 친구는 특이했습니다. 스피치를 마치면 보통 학생들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인사하고 들어가거나, 그전까지는 당당하게 했다가도 "아, 어떡해"하면서 부끄러워 하기 마련인데요. 그 친구는 스피치를 끝내고는 어떠한 인사말 없이, 시선과 고개를 저한테 고정한 채 그대로 자리로 돌아가더라고요. 상상해보세요. 사람이 어디엔가 시선과 고개까지 고정해놓고 몸만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모습을요. 아직도 그렇게 들어가던 그 친구의 모습이, 그 눈빛이 조금도 잊히지가 않네요. 
 
그래서 사실 저는 그날 그 친구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이 교수를 그런 눈빛으로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그다음 수업시간이었는데요.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 하고 다른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슥- 다가왔습니다. 저는 긴장을 했죠. "얘가 왜 이렇게 은밀하게(?!) 다가오지?!" 그렇게 경계하는 제 귀에 대고 그 친구는 비장하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구두끈이 풀려있는 건 혹시 스타일이신가요?"라고요.   
 
사실 이 때는 조금 혼란스러웠어요. 일단 수업 시간에 제 구두까지 쳐다보고 있다는 게 먼저 당황스러웠고요.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뷰티과답게 저희 학생들은 늘 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보고 있었더라고요.) 두 번째로는 나한테 이걸 말해주는 의도가 뭘까도 싶었어요. 일단 알려줘서 고맙다고 답을 하며 구두끈을 묶었지만 이 친구에 대해 오히려 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죠. 
 
그리고 그다음 주. 역시 쉬는 시간이었는데 또 그 친구가 저에게 다가오는 거 있죠?' 오늘은 뭔가 했더니 "교수님, 뒷머리가 떠있어요."라고 말해주고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더라고요. 그때서야 저는 제가 그 친구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나쁜 친구도 아니었고, 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요. 반대로 참 사려 깊고 배려심 있고, 심지어 저한테 관심까지 있었던 친구(?!)였는데 말이죠. 
 
"어렸을 때는 괜히 좋아하는 사람을 더 괴롭히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관심을 표현하고는 했는데..."라는 말,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많이 하기도 하고 참 많이 듣기도 하는 말인데요. 음, 이 말이 저는 '어릴 때'에 꼭 국한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괜스레 한 번 건드려 보고, 놀려 보고 하면서 자신의 관심을 표현해보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 역시 여전히 좀 그런 것 같고요. 
 
저는 그런 표현 방법을 '어려서'라거나 '서툴러서'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표현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른 거예요. 다르니까 오해할 수 있는 거고요. 그래서 우리는 소통해 봐야 하는 거죠. 
 
레이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서 괜히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어도 사실은 내 구두끈과 뒷머리에까지 관심을 가져주는 좋은 학생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어쩌면 우리 주위에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헷갈린다면 저처럼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지 말고 한 번만 용기 내서 살짝, 약간은 장난기도 섞어서 물어봐보세요. "너 나 싫어해?!"라고 말이죠. 아마 진짜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그 질문은 소통의, 그리고 저와 그 친구가 그랬듯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되어 줄 겁니다. 질문은 거의 언제나 항상 옳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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