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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Dec 03. 2020

최악의 상황이 최선의 상황이 될지도 모르기에

수능에서 수학을 망친 게 내게는 최선이 되었다.



"고생 많았어. 주님이 주시는 게 최고의 것이라는 거 믿고 푹 잤으면 좋겠다."



수능을 다 보고 나오니 나의 멘토인 목사님에게서 이런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저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수능 시험장을 나오면서 바로 채점을 해봤기에 내가 수학 시험을 망쳤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은 원래부터 내 약점이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차근차근 성적을 올려서 수능 직전 모의고사에서는 1등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마킹 실수까지 더해지면서 '망쳤다'라는 표현 이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성적이 나왔다. 거기다 내가 어려서부터 꿈꾸던 대학은 수학 성적에 가중치까지 뒀었기 때문에 수학을 망쳤다는 것은 꿈의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수학을 망친 게 어떻게 최고의 것이라는 거지...?



수능을 보고 그다음 주에 논술 시험을 볼 때까지 나는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수능을 정말 잘 볼 거라는 자신을 넘어서 확신까지 있었기에 실망감이 더 컸던 것이다. 이제 남은 희망은 수시 2-2 논술 우선선발 전형밖에 없었지만 사실 이것도 희망은 아니었다. 나는 논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고 그 해 초에 있던 논술 전국모의고사에서는 당당하게 하위권을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는 수시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외고생이었지만 반 꼴찌를 도맡아 하던, 내신 7.8등급의 학생이 수시로 대학을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한참을 싸우다가 9월 모의고사 수학 성적으로 내기를 했다. 9월 모의고사에서 수학이 1등급이 나오면 수시를 안 쓰고, 그 이하 등급이 나오면 수시를 쓰기로. 내기를 할 당시 내 수학 성적은 3-4등급을 왔다 갔다 했지만 그러기로 했다.



9월 모의고사 당일, 수학을 처음으로 잘 봤다는 느낌이 들었고 집에 와서 예상 등급컷을 보니 1등급이었다. "역시! 나는 수능으로 대학을 갈 운명이야."라고 생각했지만 성적표를 보니 2등급이 떴다. 예상 등급컷보다 1점 높게 1등급 컷이 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시를 썼다.



하지만 수시를 쓰면서도 생각했다. "나는 수능에서 올 1등급 받아서 논술 시험 보러 가지 않을 거야."라고 하지만 수학이 그 꿈을 처참히 무너뜨렸고 나는 논술 시험을 보러 갔다.



그리고 많은 과정을 비약해서 결과를 쓰자면...나는 그렇게 1점 때문에 억지로 쓴 수시로 어려서부터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내가 나온 대학교는 당시에 1학년 때 학부 생활을 하고 2학년이 될 때 1학년 때의 성적으로 전공 과가 결정이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수시로 입학한 학생들은 애초에 전공을 받고 학부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나면, 대학 1학년을 방황하느라 1학기 1.85, 2학기 2.1의 평점을 받았던 나는 수시로 입학하지 않았으면 결코 국어국문학도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수능에서 수학이 3등급이 나온 것이, 그래서 수시 논술을 보러 간 것이 나에게 전공을 미리 결정할 수 있게 해 줬고 덕분에 스무 살이라는 시간을 편하게 방황하며(!?) 보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결국 주님 주시는 게 최고의 것이라던 목사님의 말씀은 맞았다. 수학 3등급이 내게는 최고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수능을 본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어쩌면 나의 이 글도 어떤 수험생들에게는 마음 아픈, 또는 부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마음 담아서 말하고 싶은 건 내가 보기에 최악의 상황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히려 최선의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어줬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인해 역대급으로 가장 힘들었을 올해의 수험생들이 그래도 이 밤만은 편안하게 고생한 스스로를 토닥이며 잠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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