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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Mar 03. 2022

"우리는 저 소품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예요."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처음 나가봤던 날이었다. 날이 따듯해지고 있던 것 같더니 하필 내가 나간 날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다. 거기다가 촬영 장소는 경기도 연천에 있는 산 중턱이었다. 어쩐지 캐스팅 담당자분이 몇 번이나 전화를 먼저 걸어 주더라니... 보조 출연을 완전히 업으로 삼고 계신 분의 말을 빌리자면 ‘최고 난이도’의 촬영 날이란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찰이나 소방관을 맡는 와중에 몇 명 되지 않는 기자 역할을 맡게 됐다. 은근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잘못된 뿌듯함이었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드라마였기에 얇은 정장에 얇은 코트만 입은 채 영하 15도의 산에서 기약 없는 대기를 해야 했다.      


소방관이랑 경찰 옷이 훨씬 더 두툼하고 따듯해 보였다. 눈 부신 조명 아래서 계속 뛰면서 촬영을 하고 있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나는 촬영지에서 살짝 떨어진, 빛이라고는 달빛밖에는 없는 곳에서 그저 서있기만 했으니. 손이 시려서 폰도 꺼내보지 못한 채.      


‘이제 곧 불러주겠지, 이번에는 불러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그 추위에서 다섯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한계에 다다를 때쯤 “이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럴 거면 버스에서 대기를 시키든가!”하고 다른 보조 출연 선배(?)들에게 볼멘소리를 해봤다. 그랬더니 가장 보조출연 경력이 많은 분이 씩 웃으면서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여기 밑에 기자 역할 소품들 보이죠? 저기 촬영하는 사람들한테 우리는 이 소품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예요.”     


타이밍 좋게 그 순간 그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탄 밴이 도착했다. 밴은 우리가 대기하던 근처에 주차를 했고 그 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나도 꽤나 좋아하는 유명한 배우가 내렸다. 그리고 그 배우의 뒤를 따라 수많은 스태프들이 붙어 따라갔다. 어둠에서 대기하던 우리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대비가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주연 배우의 등장과 함께 우리의 다섯 시간 대기도 끝났고 촬영은 거의 10분 정도만에 끝이 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순간에는 나도 ‘우리와 소품이 다를 바 없다.’라던 그 말에 공감을 했던 것 같다. 특히 주연 배우가 등장했을 때는 나 역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가치를 가진 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걸 후회한다. 다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한 마디 꼭 건네고 싶다.     


우리는 소품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그 영하의 추위 가운데 고생을 하며 군소리 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신의 힘이라고. 이 어려운 시국에서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그 순간에는 아니었을지언정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그 배우처럼 사랑받는 귀한 존재일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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