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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Sep 02. 2020

자칭꼰대교수와  특'별난' 제자들의 이야기 하나.

"카리스마 넘치는 전문적인 교수님 vs 곰돌이 한 마리."


개강 첫날. 그것도 월요일 1교시. 자신들이 듣고 싶다고 선택하지 않았지만 과에서 강제적으로 시간표에 넣어 놓은 교양 수업. 심지어 '스피치'.  
 
휴,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는 딱 하나만 바랐습니다. 제발 학생들이 수업에 와서 제 앞에 착하게 앉아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것 말이죠.  
 
1교시 수업 시작 10분 전인 8시 50분. 저는 조금 일찍 강의실에 들어갔고 출석부를 펴고 강의안을 모니터 화면에 띄우며 이러한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 연기를 했습니다. 사실은 엄청 긴장했으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앞에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슬쩍 학생들을 봤는데 수업 10분 전인데도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와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놀란 건 1교시임에도 거의 모든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풀메이크업' 상태였습니다. "아, 역시 뷰티매니저과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었죠. (물론 이 생각은 그 다음 주부터 철저하게 깨졌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아니기에 제가 첫 수업에서 가장 신경썼던 부분은 학생들에게 '젊지만 카리스마 있고 전문적인 이미지의 교수님'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리엔테이션과 짧은 첫 수업이 끝났을 때 학생들이 박수를 쳐주길래 "종강날도 아닌 개강날에 박수를?! 훗, 역시 나 잘해냈군."하면서 잔뜩 뿌듯해했죠.  
 
그런데요. 아주 나중에 알게 됐지만 박수 받은 수업을 했을지는 몰라도 카리스마 있고 전문적인 이미지의 교수로 보이고 싶다는 저의 목표는 철저히 실패했었더라고요.  
 
"그냥, 교수님도 아닌 것 같고 조교도 아닌 것 같은데 이 수업을 맡게 되었다면서 곰돌이 한 마리가 앞에서 사람 모습을 하고 말하는 느낌...?"
 
"무게 잡고 진지하게 무표정으로 출석을 부르시는데...왠지 아- 강의하실 때 장난 많이 치면 저 이미지 깨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어요."
 
"표정은 되게 날카롭고 차갑게 계시는데... 막상 말씀하실 때 말투나 목소리가 부드럽고 따듯해서 놀랐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되게 카리스마 있고 전문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희 학생들은 첫날부터 저의 정체(!?)에 대해 잘 간파했더라고요.결국 저는 카리스마 있고 전문적인 척(?!)하는 한 마리의 곰돌이(?!?!)처럼 보였던 거죠.  
 
...스피치 상황과 내용에 따라 이미지부터 톤까지 많은 것들을 적절하게 바꿔야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자신다움'은 숨길 수가 없나봐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배우들 연기를 봐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연기를 잘 하는 몇몇 배우가 아닌 이상 분명 다른 영화의 다른 배역인데 그 배우의 이전 역할이 겹쳐보일 때가 많잖아요. 또는 어떤 역할을 해도 비슷하게 보이거나 말이죠.   
 
근데 사실은요. 저도 제자들을 보면서 그랬어요. 아까도 말했듯 학생들이 대부분 풀메이크업 상태로 수업을 들었거든요. 뷰티과 특성 상 화장도, 액세서리도, 의상까지도 화려하게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심지어 가죽 자켓은 왜 그렇게들 많이 입었는지. 소위 '기 센 언니'들처럼 보였던 거죠. 그래서 수업 시작 전에는 제가 한편으로 조금 더 쫄아있던(?!)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출석을 부르고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니까 얼굴과 비주얼은 화려하고 기 세 보일지언정, 저를 바라봐주는 눈빛이 너무나 초롱초롱 빛나고 있더라고요. 그 눈빛 덕분에 신나게 첫날 수업을 할 수 있었고요. 수업이 끝나고 박수까지 쳐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기 센 언니들은 어디로 가고 세상 이런 순딩이들이 앉아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가면을 쓰고 삽니다. 음, 그 가면이 때로는 더 멋져 보이기도 하고 그 가면이 없는 나의 민낯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살기도 하죠. 사실 제가 그랬어요. 항상 남들 앞에서 저는 '멋진' 이미지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생각이 강의 첫 날에도 강하게 있었던 거고요.  
 
하지만 수업이 다 끝난 지금,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그렇게 카리스마 있고 전문적인 가면을 쓰고 있을 때보다 제 민낯을 편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학생들이 그 모습을 더 좋아해줬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아준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메이크업으로, 의상으로, 액세서리로, SNS에 올리는 글과 사진으로 스스로를 꾸민 모습보다 화장기 하나 없이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아침 대신 사온 빵을 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렸을 때, 하필 그 민망한 순간에 저랑 눈이 마주쳤던 그 모습이 저는 훨씬 예뻤으니까요.  
 
글은 스피치에 대한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스피치'하면 주로 공적인 상황에서의 말하기를 떠올리시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스피치'를 그냥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말하기'로 많이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 그런 모든 말하기 상황에서 어떤 가면을 쓰기 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나 잘났어"하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보다 어딘가 어수룩한 사람에게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을 열잖아요? 그러니까 언젠가는 벗겨질 가면 쓰고 있느라 괜히 애쓰지 말고요. 처음부터 조금 더 용기내서 자신의 민낯을, 자기다운 모습을 솔직히 보여준다면 훨씬 더 매력적인 말하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럼으로써 훨씬 더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제가, 그리고 저희 제자들이 그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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