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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질고개 Mar 26. 2024

12. 용감한 소년 안병진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갑자기 움막으로 큰 흙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 버렸다. 잠시 후 또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막대기를 움켜쥐고 움막 기둥을 두드리면서 워-워-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움막 비닐을 열고 나와 손전등을 근거리와 먼 거리, 하늘을 비추며 방향을 마구 흔들었다. 동시에 땅바닥과 주위에 있는 농기구들을 막대기로 두들기고 부딪히며 최대한 큰소리를 냈다. 그제야 나는 맨발로 뛰쳐나와 아버지 등 뒤에 바짝 붙어, 양철통과 막대기를 집어 들고 마구 두드리며 돌멩이를 찾아 더 큰 소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더 이상의 흙덩이는 날아오지 않고, 크게만 들렸던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도 소음을 멈추며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버지 등을 꼭 껴안고 누운 채 땅바닥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 단속적으로 숨을 참아가며 미세한 소리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적막 같은 시간이 흘러가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버지와 함께 수박밭을 둘러보았다. 숲에 인접한 밭의 가장자리는 발자국이 확실치 않은 무엇에 의해 수박 넝쿨이 손상되어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생각보다 큰 피해는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소유한 전답이 없어 하천부지와 마을 뒷산 꼭대기 등, 버려진 땅을 온 가족이 가꾸며 과일과 곡식을 심었다. 여름에는 마을 뒷산 꼭대기에 수박을 심었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그곳에는 들짐승들이 많아 움막을 지어 항상 밤낮으로 사람이 지켜야만 제대로 농사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오 남매 모두가 학교를 다녀온 뒤에는 각자 점심을 찾아 먹고 부모님이 일하시는 뒷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특히 수박이 열리고 익어갈 무렵이 되면, 아버지와 나는 허술하게 지은 움막에서 잠을 자며 밤사이 야생 동물 등 침입자로부터 수박을 지켜야만 했다.

  

그날의 침입자가 어느 정도의 무리이고 몸집이나 형상이 드러나지 않아 어둠 속 정체불명의 공포가 더 커지면서 우리는 움막을 벗어나 맞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움막을 단단히 지키며 소음을 높이고, 손전등 불빛을 흔들어 위협하면서 내면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사력을 다해서 몸부림쳤던 그날의 공포는 내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편,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 드렸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되어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최소한 4명의 자녀가 있어야 2명씩 2개 조로 2명은 집에서 어머니를 지키고, 들판에서는 나머지 2명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가 역할을 나누어 아버지인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용감한 소년 안병진     


고향 마을의 ‘멋질고개’에는 ‘용감한 소년 안병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정의와 함께하며 산 하나쯤 단번에 뛰어넘을 정도의 엄청난 점프력과 강한 주먹을 가지고 있었다. 불의에 맞서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악한 무리를 깨부수는 그의 이야기는 마침내, 우리 가족의 잠자리 영웅담이 되었다.


어느 두메산골에 가난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데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던 제비가 물어다 준 수박씨를 뒷산에 심었더니, 세상에서 제일 큰 쌀가마니만 한 수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그 수박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산꼭대기에 심었기 때문에 함부로 훔쳐 가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 살던 호랑이와 곰이 깜깜한 밤중에 수박을 먹으러 마을 뒷산으로 내려왔다. 그날 움막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은 호랑이와 곰의 공격을 받아 크게 다치고 피를 흘리며 필사적으로 산 아래로 도망쳤다. 그러나 아들이 막다른 벼랑에서 호랑이와 다시 맞서게 되었다. 위기의 상황이었다. 그때 저 멀리 밤하늘을 가르며 ‘용감한 소년 안병진’이 나타나서 번개 같은 속도로 급강하해 호랑이의 꼬리를 냉큼 잡아 다시 하늘로 솟구치며 호랑이를 던져버렸다. 

용감한 소년 안병진이 호랑이는 퇴치했으나 곰을 찾지 못해 뒷산 이곳저곳을 헤맸다. 한편,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찾아다니다가 곰을 다시 만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곰도 재빠르게 따라 올라와 큰 앞발로 이리저리 할퀴어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때 아버지의 비명을 듣고 ‘용감한 소년 안병진’은 다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그 위치를 파악한 후, 급강하했다. 나무 꼭대기 잔가지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아버지를 구하고, 아들이 있는 큰 바위 아래의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소년은 아직 도망가지 못한 곰을 칡넝쿨로 소나무에 단단히 묶어 버렸다. 

지금도 그 나무에는 곰의 형상을 한 자국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그 나무를 '곰솔'이라고 했다.     


그것은 ‘용감한 소년 안병진’이 구해준다는 우리 가족의 유치한 잠자리 이야기다. 두려움 많았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전래 동화와 즉흥적으로 조합한 ‘재즈동화’라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늘 한 방에서 생활했다. 밤이 깊어지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방안에 불을 끄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이때 나는 아이들에게 ‘용감한 소년 안병진’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이야기가 집중되는 동안 아이들은 무서움과 긴장, 통쾌함으로 극도의 감정 변화를 느끼고 즐겼다. 그리고 나 또한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찾아 맞서는 소년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이가 되어 상상과 공상의 두려움, 그리고 꿈속을 용감하게 질주하며 여행했다. 또한 유년 시절, 움막에서의 그 공포를 다시 찾아가 그날 밤 어두운 산속을 힘차게 달리고 날아오르면서 스스로 치유받기도 했다.          


악몽과 트라우마     


가끔 술에 취해 잠들 때면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꼭 같은 악몽을 꿀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그 움막에서의 장면이 그대로 이어지며, 정체불명의 공포와 그림자가 문틈을 살짝 열고 멀리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회사 동료들과 저녁 회식을 했다. 연말 송년회를 겸하는 자리라 참석자들도 많았고, 한 해를 정리하는 따뜻한 분위기에 나는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다. 퇴근해 보니 큰아들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밤늦게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해 곧바로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다시 한번 그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때 나는 반사적으로 큰 소리로 외치며 소음을 크게 만들고자 침대 머리를 두드렸다. 큰아들이 놀라 안방으로 달려왔다. 아들이 나를 껴안고 쓰다듬어 주자 나는 비로소 그 원두막 아래의 움막을 벗어나 악몽에서 깨어났다. 아내와 아들 앞에서 멋쩍기도 하고 약해진 아버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거실로 나가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시간이 지나자, 유년 시절의 그 정체 모를 공포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들이 나를 돌보며 위로하게 될 줄이야.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은 흘러간 건가? 이제 용감한 소년은 바로 우리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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