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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질고개 Apr 02. 2024

13. 아빠가 읽는 청소년 필독서

식탁 테이블에 놓인 몇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청소년 필독서로 아이들 숙제를 위해 아내가 구매한 책들인 것 같다. 그중에 한 권 - ‘빨강머리 앤, 주근깨 얼굴이 예쁘진 않지만 사랑스럽다’라는 책 소개 글에 마음이 끌린다. 앤과 길버트가 그린게블스 마을에서 유년 시절 학업을 경쟁하며 좌충우돌 함께 하는 성장 소설, 그들의 작은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깊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책을 지금까지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구나!     


어린 시절에 책 한 권 제대로 읽지도 않고, 시골에서 아무렇게나 보내 버린 유년 시절을 들켜버린 듯해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 교실에서 독서 등 학업에 충실하지 못해 섬세한 감성들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와서 자녀의 학교 숙제로 제시된 추천 필독서를 몰래 훔쳐 읽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온종일 그 한 권의 책을 들고 안방과 거실을 오고 가며 책을 읽는 몰입감이 신선하다. 아내에게 책을 읽으며 느끼고 있는 묘한 감정들을 이야기했다. 서울에서의 학창 시절을 항상 모범생으로 자란 아내로부터 남편의 무지와 무식에 대한 당혹감과 약간의 연민이 느껴졌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절대 어린 시절 공부나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대신 나는 아이들의 학교 독서 추천서를 미리 구매해서 출퇴근 버스에서 읽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위장된 독서와 유년 시절의 정서는 아내와 잘 지켜져 나도 좋은 독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 필독서를 거의 읽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독서의 마법을 그때 비로소 공감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독서 속에서 우러나온 간접적인 이야기를 통해 생동하고 일깨워지는 특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내 속에서 문학에 관한 관심과 흥미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재능이 있다기보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고전 명작 소설은 청소년의 필독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이 된 후 풍부한 인생 경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어 더 감동적인 것 같다. 『빨강머리 앤』을 읽고 호기심에 양장본과 만화, 캐나다 드라마 등 관련 미디어를 모두 독파했다. 길버트와 앤의 학업 경쟁 관계와 성인이 된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졌다. 언젠가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꼭 여행하고 싶다. 아내는 동네 바자에서 찾은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손가방을 지금도 외출 필수품으로 여기며 가지고 다닌다. 학창 시절의 길버트보다는 늦었지만, 나도 사회에서 멋진 학생, 모범생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서의 도덕적 완성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내에게만은 말이다.     


고전 독서의 몰입은 플라톤의 『국가(번역 천병희 교수)』와 단테의 『신곡』까지 이르러 아내와 독서 토론을 함께할 수 있었다. “신발 한 켤레 살 돈으로 위대한 사람의 한평생을 살 수 있다”라고 말했던 대만 독서가 탕누어가 생각난다. 내 삶에서 독서를 통해 행복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게는 좋은 독서 습관이 생겨 학업에 소홀했던 유년 시절을 꽤 많이 보완하고 메워왔다. 허겁지겁 보내 버린 나의 유년 시절과 청춘에게 위로를 보낸다. 

걱정하지 마, 이젠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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