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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nokjoo Nov 09. 2015

그에게 박수를

외로웠던 그에게 웃으며 박수를.

너울의 날개 끝엔
내 몫의 하늘
아픔은 더욱 빛나
한 줄기 흐르는 혼


이것은 아빠의 묘비에 쓰인 글이다.

이 글은 아빠가 쓴 시 중 내가 골랐다.

나는 아빠에게 인사를 가면 꼭 이 글을 읊는다.

이 글이 아빠인 것 같아서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대신.


아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나는 크게 놀랐을 뿐,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미 영혼이 없는 아빠의 몸을 내가 껴안았다.

장례를 치룰 때 나는 정신을 잃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장례식에서 아빠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친구분들 중 한명은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향과 라이터를 들고

한시간을 고개를 숙이고 서계셨다.

그 옆에 나도 서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향불을 올리지 않고 뒤돌아가셨다.

그가 떠난 자리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는 내 검은 치마자락으로

그 눈물을

닦고 닦고 닦아내었다.


아빠의 몸을

의과대학 연구목적으로 기증을 한다고

내 싸인을 받아가신 것이

불과 내 나이 열다섯이었다.

그리고 십몇년이 지나

아빠의 몸이 정말 의과대학으로 보내졌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까.

내가 아빠의 죽음을 예고받은 것은.


아빠의 몸이 2년동안 해부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빠의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 2년동안 나는 유령처럼 내 삶을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그 장면이 상상되었고

잠을 자다가도 내 상상은 끝이 나질 않았다.

심한 날엔 상담을 받고 미친 사람처럼 울고 왔다.


그래도 나는 착한 딸이 되어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빠를 이해하고

아빠를 당신이 뜻한대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아빠의 외로웠던 죽음이

결코

더 쓸쓸하지 않게.


그리고 몇해가 지나

나의 오빠는 헝가리로 이민을 갔다.

오빠는 나보다 아빠의 죽음을 많이 힘들어했다.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방식을 오빠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차라리 오빠가

나의 친구였다면

내가 해줄 말이 많았을텐테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나의 오빠였기 때문에

우리가 아빠의 몸에서 나온 가족이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게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오빠도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가는 나를 보고

또 말을 삼키곤 하였다.


그가 헝가리로 떠나는 날,

나는,

잘가라고만 하였다.

그는 내게,

잘지내라고만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보내는 내 마음이, 떠나는 그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섧다라는 것을.


아빠가 떠나고

오빠가 떠났다.

그리고 내 곁엔,

헤어졌던 그가

아빠의 장례식때 나를 찾아와 안아준 후로

변함없이 머물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게는 여보라는 이름이,

내 딸아이들의 아빠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결혼한 후로부터

나의 엄마와 함께 살아주었다.


우리 다섯 식구는 이제 웃으면서

아빠를 이야기한다.

한때는 내 하늘이었고

또 한때는 내 무거운 어깨였던 그를.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 삶이

익어간다고

아주 잘 익어간다고

위로한다.


이 컵은 차마시는 내 손이 차가울까                                             어느 날 아빠가 손잡이에 털실을 감아주신 내 보물 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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