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가 살아 숨쉴 때,
작품은 생명력을 얻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by 안상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제 마음대로 영화를 리뷰합니다.



*이 리뷰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명작을 바라보면서 “생명력이 넘친다”고 말한다. 작품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가일까? 위대한 작가들은 죽어있는 것도 살려내는 명의일까? 적어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창작, 생명을 불어넣다?

1.jpg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Portrait of a Lady on Fire)]

18세기 프랑스의 귀족 여성은 정해진 결혼 상대에게 초상화를 보냈다. 자유를 갈망하는 엘로이즈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에 저항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된 예술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마음을 움직이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생명력이 없는 첫 번째 초상화는 지워진다. 관습을 거부하고자 하는 작가와 모델은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에 숨을 불어넣고자 한다. 두 번째 초상화는 사랑에 대한 그들의 태도로 그려진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포즈와 표정을 정하고 구도를 구성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반면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오롯이 응시하며 농담을 던진다. 작품을 그리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피사체 역시 예술가를 응시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는 이별을 고한다. 예술가는 순간이 아닌 영원을 위해 작품을 신화로 만든다. 신화가 될 이야기는 예술가와 피사체의 교감이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고 아내를 잃어버리는 것은 예술가적인 선택이다. 가장 비극적인 이별은 불멸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예술가가 꿈꾸는 수동적인 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필연적인 이별 앞에서도 마리안느가 진심을 말해주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르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 앞에 다시 나타난다. 작품이 되어 나타난 엘로이즈는 그림 속 암호를 통해 마리안느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림 밖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추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마리안느의 시선을 느꼈지만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다. 신화가 아닌 재회를 꿈꾼다. 결국 살아 숨쉬는 것은 피사체였고 영원은 작품 밖에 있었다.



클라이막스는 클라이막스다.

2.jpg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Portrait of a Lady on Fire)]

이른바 예술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유행처럼 클라이막스를 숨기고 있다. 작중 의도를 최대한 건조하게 전하기 위한 이 테크닉은 때때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와 부정교합을 이루기도 한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해당 작품을 외면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다르다. 메시지는 명확한 기승전결로 전달된다. 셀린 시아마는 사랑을 대하는 연인들의 자세를 통해 예술가와 피사체의 호흡을 그린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그는 피사체, 엘로이즈의 손을 들어준다. 끝내 돌아보지 않는 엘로이즈의 맹렬한 저항만이 스크린에 남아 있다. 관객들은 복잡한 해석 없이도 엘로이즈의 결심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셀린 사야마의 테크닉은 잊혀지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이 관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캐릭터가 창조자와 대등한 위치에 선다.


예술의 역설은 작품을 관통한다. 18세기 두 여인의 사랑은 이별로 시작한다. 자유와 관습에 저항하는 사랑 이야기를 그리지만 셀린 시아마는 주체적인 캐릭터들을 구조적으로 통제된 프레임에 가두고 있다. 명화 속에 한 장면 같은 색감과 구도는 세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두 인물이 입은 의상의 색상이 특별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예술가는 자신의 기술을 통해 영원을 창조하고자 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순간적인 감상이며 영감이다.


피사체가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 작품은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영롱한 색감과 조작된 프레임이 아니라 엘로이즈의 맹렬한 저항이어야 한다.




결국 살아 숨쉬는 것은 피사체다.

타오르는 그녀는 맹렬한 저항으로

예술가가 꿈꾸는 수동적인 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 4/5



Synopsis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을 사랑의 기억을 마주하게 할 걸작을 만난다!



Information

제 목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Portrait of a Lady on Fire)

감 독 | 셀린 시아마

출 연 | 아델 하에넬 / 노에미 메를랑 / 루아나 바야미 / 발레리아 골리노 / 크리스텔 바라스

장 르 | 드라마

수 입 | 그린나래미디어㈜

배 급 | 그린나래미디어㈜, 씨나몬㈜홈초이스

러 닝 타 임 | 121분

관 람 등 급 | [국내] 15세 관람가

개 봉 | 2020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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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상현/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최종 수정 2020년 4월 15일 화요일 l 글 안상현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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