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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un 09. 2020

애닲음 구간

헤어짐을 준비하는 시간

2020년 6월 9일

날씨: 낮엔 여름, 밤엔 시원

기록자: 동그라미


독일에 돌아갈 계획이에요?


이렇게 따로 커피 한잔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멋쟁이 A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4월부로 나의 직장 보스가 된 그는 12월에 종료되는 계약 이후의 내 삶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K는 박사를 할 계획이 있으니 유럽에 있는 게 단연 좋아 보여요. 벌써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반면에 저는 독일에 있을 때와 여기 있을 때, 생각의 구체성 정도가 많이 달라요 확실히. K랑 다르게 전 독일에서 특히 언어 때문에 곧잘 위축되었고 그게 생각보다 힘든 문제더라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려면, 독일에서 제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좀 찾아봐야겠죠... 문장을 마칠 때마다 나는 포크로 초콜릿 케이크 끝자락을 분질렀다. 국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자상한 여성 리더 앞에서, 나는 말을 하면 말을 할수록 어쩐지 독일로 돌아가려고 했던 계획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혹시 자기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사람처럼, 아니면 대단히 순종적인 사람처럼 보였을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바이로이트 시내 공원의 나무들

지난 두 주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 돌아서면 야근이고 출근이다. 나는 현재 사회에서 청년이라 부르는, 내 또래들을 지원하는 한 중간지원조직에 다니고 있다. 어느덧 여기서 일을 한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나는 이제 지하철 한 칸에 몇 명이나 앉는지 알게 되었고, 이름도 종착지도 모르지만 한 시간 넘게 동선이 겹치는, 낯익은 출근 동무들이 생겼다. 직장인이 되는 것은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분단위로 정확해진 매일의 루틴, 쉼터와 일터가 구분된 생활, 감수성이 뛰어난 동료들과 나누는 새로운 대화, 그리고 매달 정확하게 꽂히는 월급. 모든 게 이전 생활과 정확히 반대였다. 여전히 아침마다 제시간에 출근 카드를 찍지 못할까 봐 지하철역 층계를 두 칸씩 오르며 괜히 마음을 졸이긴 해도, 좋다. 간만에 회사원.

아니, 이 시국에 구직을 했으니, 행운이라 말해야겠다.


그사이 K는 6월 22일에 독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확정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제 6월 15일을 기점으로 해외유입을 허용하는 분위기다. 다수의 국가가 객관적으로 충분히 안전하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경제를 더 위축시킬 수 없어 개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운행을 정지하다시피 했던 대한항공도 영업을 재개했고, 취소되었던 K의 티켓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역풍에 밀려 논문 작업을 시작도 못했기에 비자 문제없이 석사 졸업을 하려면 K는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기존에 우리는 3월 중순에 함께 다시 출국하기로 계획했었고 꼭 3개월 만에 일상적인 궤도로 돌아가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고, K 혼자.


밖에서 워낙 점잔을 빼니 친한 친구들조차 우리가 얼마나 질척이는 커플인지 잘 모른다. 단둘이 있을 때면 자못 심각한 시지프스들이 되어 머리가 탈 때까지 온 세상 걱정을 굴리다가도, 갑자기 무장해제된 꼬마들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리고, 노래가 들리기만 하면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덩실덩실 춤추며 논다. 친구로 지낸 10년, 연인으로 지낸 5년. 그중 특히 2년은 독일에서 산전수전을 같이 겪으면서, 어느덧 우리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가장 깜깜한 어둠과 가장 밝은 빛을 보여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함께 독일에 있는 동안 3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살았던 우리는 주말마다 살을 에는 듯한 만남과 헤어짐을 자주 반복했고 그 전후에 찾아오는 애닲음과 쓸쓸함에 이미 만성이다. 어쩌면 우리를 돈독하게 만드는데 역할을 했을지 모르는 그 죽어도 싫은 기분이, 다시 한번 떨어져 지내야 하는 3개월을 앞두고 우리를 술렁이게 만들고 있다. K와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내야 하는 때가 다가오자, 비로소 나는 내가 코로나로 인해 얼마나 큰 결정을 내렸던가 재차 확인하게 된다.




딱히 독일 생활을 크게 그리워한 적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좀 다르다. 아침 6시 50분 타월로 물기 묻은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작은 내방 침대 맡에서 옷과 이불을 개다가, (더 이상 지갑 걱정 안 하고) 별생각 없이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시키다가, 회사에서 준 낡은 노트북으로 구글 드라이브를 탐색하다가, 그냥 문득 떠오른다.

바이마르 기숙사 방에 누운 채로도 볼 수 있었던 창 너머 키 큰 나무의 이마, 바이로이트 숲에서 카메라를 연신 닦아내며 나무 심는 시민들과 함께 맞았던 비, 뽈을 보러 런던에 갔을 때 음식을 해 먹던 4층 에어비앤비 플랫의 작은 주방 같은 게. 그 어떤 낯섦에 대한 그리움이 아주 진하고 아프게, 회사원이 된 나에게 드문드문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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