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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Nov 14. 2020

가장 다정한 누군가와 함께 했던 치앙마이

<Fix you> , Coldplay



1.


이제 나 뭐하지?





열심히 걸어가던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떠게 할까?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하얀 가운을 입고 걸어가는 그 길은, 준비를 하면 할수록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분명 내가 뜨거운 마음을 품으며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었는데.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나는 공부가 힘들어서 그런 거냐고, 그래서 투정 부리는 거냐고 자문했고 그때마다 이렇게 자답했다. 꾀병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옷, 딱 맞아서 어쩐지 걸을수록 더 불편한 운동화, 들고 다닐수록 너무 무거운 가방 같은 느낌이라고. 그러면 나는 다시 나를 달랬다. 중도 포기란 없으니 해볼 수 있는 만큼 전력을 다해보자고. 그래도 아니라면 그때 시원하게 접자고.  


최선을 다했던 건 잘한 일이었는지 더 이상 이 길을 가지 않겠노라, 종지부를 찍을 땐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일말의 아쉬움이나 후회가 남지 않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고 덕분에 내 안엔 어떠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 아주 깔끔하다. 


그러나 열정을 품고 오랜 기간 동안 걷고 뛰고 쉬다가 다시 걸었던 길이었다. 고뇌하고 한숨 쉬고 울고 웃었던 바로 그 길에서 안녕을 고하고 나오는 건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때의 난, 조금 허탈하고 많이 막막했다. 지금까지 공부한 이 시간들이 공수래공수거가 될까 봐, 앞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데 당장 갈피를 못 잡겠어서, 나와 꼭 맞는 길을 걷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몇 년간의 수험생활이 끝난 직후, 무기력과 우울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때마침 찾아온 겨울에 마음이 더 시려 밖에도 나가기 싫어했다. 그 와중에 미리 끊어놨던 치앙마이행 티켓은 취소수수료가 비싸 망설이고 있었다. 


"어떡하지 엄마?"

"뭘 어떻게 해. 우울할 거면 그냥 거기 가서 우울해해."


역시 엄마는 엄마지. 나는 결국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짐을 싸서 치앙마이로 떠났다. 나를 무겁게 하는 상념도 가득 안은 채. 연말에서 연초로 넘어가는 2주간의 여행이었고 다행이었다. 밖에 나가는 것도 싫어했던 내가, 우울감에 젖어있던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설레어했으니. 마침 그곳의 계절은 초여름 날씨였고, 그만큼 따뜻한 겨울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낯선 여행지에서 혼자 연말과 연초를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여러모로 재충전하기 딱 좋은 여행인 것이었다.


여행은 이런 식이었다. 


터벅터벅. 

아 예쁘다. 여기 좋네.  

터벅터벅. 

아 이제 나 뭐하지. 



여행지에서 홀로 걸을 때면 언제나 음악을 듣던 나는 그때도 어김없이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 평소에도 듣던 곡의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가 하나, 둘씩 내 귓바퀴 안으로 들어왔다. 곡의 첫 부분부터.


When you try your best but you don't succeed

when you get what you want but not what you need

when you feel so tired but you can't sleep...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하지 않았을 때

원하는 걸 얻었는데 필요한 걸 얻지 못했을 때

너무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을 때...)


에? 나잖아? 가사가 담긴 이 멜로디는 내 귓속으로 들어와 고막을 즐겁게 건드릴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내 마음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잘 들어보라고, 이건 너를 위한 노래라고. 나와 함께 걷자고.


그때부터 나는 그 노래를 반복 재생하며 치앙마이의 구석구석을 걷기 시작했다. 




2.


"너 콜드 플레이의 Fix you 알아?"

"아니. 어떤 곡이야?"

"되게 따뜻한 노래인데 가사가 요즘 내 상황 같아서 여행 내내 듣고 있어. 들어볼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어느 독일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밤, 우리는 키친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셨고, 나는 그와 여행에 대해 얘기하다 이 노래를 소개했다. 그는 내가 건넨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꽂았고 나는 핸드폰으로 노래의 가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을 때....." 


가사를 읊조리던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엔 '너 지금 이런 상황이구나...'라고 쓰여있었고 나는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완전 내 얘기야."

"괜찮을 거야."


"이제부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도전하고 싶어. 용기를 내보려고 하는데 자신이 안나.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용기 낼 수 있어. 계속 생각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행운을 빌게."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괜찮겠지? 



Go on, spread your wings, 2017





3.


무얼 하고 싶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뭘까?


여행 내내 계속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의 내면은 시끄러웠지만 그것은 '혼돈'이 아닌 '정리'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점차 내 안에서 진실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거짓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그 소리가.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싶어. 동시에 여행을 하면 좋을 것 같아. 유럽에 가고 싶어 그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아,  영국에 가고 싶었지? 맞아 나 영국에 너무 가고 싶어. 그곳에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런데. 


가능할까?



막연하게 하고 싶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 나는 두려웠고 자신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 막연해서 구체적인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데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때 그 곡의 2절 가사가 내 마음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조용히 응원했다. 아주 고요히. 너무나 차분하게.  

 


But if you never try you'll never know

Just what you're worth

(그렇지만 시도하지 않는다면 넌 절대 모를 거야.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그리고 브릿지의 가사도.


Tears stream down your face 

I promise you I will learn from all my mistakes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도

약속해, 실수를 딛고 일어서는 내가 될 거야.)



분명히 혼자 간 여행이었는데 꼭 가장 다정한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따뜻한 응원은 몇 년간의 수험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후 지치고 갈피를 못 잡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하며 듣던 그 곡과 함께 여행을 하며 나는 결국 발견을 했다. 내 안, 저 깊숙한 곳에 늘 사라지지 않던 소원 하나를. 찾으려고 들여다보니 그건 반짝반짝 빛을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났던 카페 사장님의 말씀처럼 답은 정말 내 안에 있었다. 내 안, 그 깊숙한 곳에 말이다.


답을 찾고 나니 나는 명쾌해졌다. 딱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답을 실행에 옮기자고. 이제는 무시하지 말자고. 영국에 가자고. 가야겠다고.   


그제야 후렴구가 들렸다. 마치 가장 따스한 빛이 나를 감싸며 같이 기뻐하듯이. 




Lights will guide you home

and ignite your bones

I will try to fix you.

(빛이 널 집으로 인도할 거고 따스하게 감싸줄 거야.

내가 널 낫게 해 줄게.)



Lights will guide you home, 2017




<Fix you>를 들을 때면 그해 연말의 치앙마이 여행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 모습도. 길을 잃어버린 내가 다른 길을 찾을 때까지, 그 헤매는 시간을 지나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때까지, 나는 내내 그 곡을 들었고, 크리스 마틴의 목소리는 매번 나를 도닥이고 응원해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최선을 다했으니 그거면 됐다고. 너의 다른 시도를 응원한다고. 그냥 해보라고. 울어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결국 빛이 너를 인도할 거라고. 그래서 너는 괜찮을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나는 시간이 지나 마침내 영국에 갔고, 가고 싶던 유럽의 곳곳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리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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