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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Nov 17. 2020

더블린은 참 친절했어, 그렇지?

<The book of love> , Justin Timberlake


1.


<The book of love>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사랑의 책이라고 해야 하나. 이 노래를 들으면 2년 전 늦가을의 더블린이 생각난다. 2박 3일로 갔지만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그 도시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던 건 딱 하루였는데 무척 운이 좋았다. 그건 바로 온전히 머물던 그 하루 동안 더블린의 날씨가 무척 좋았기 때문. (맑은 날이 드문 시기였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찬란하지만 공기가 제법 찬, 만연한 가을빛으로 물든 그 소박한 도시. 그곳을 걷는 동안 나는 지극히 도시의 가을과 잘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이 떠올랐는데 그 곡이 바로 <The book of love>였다.



“A, 더블린 여행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



이 노래를 듣다 더블린의 추억이 몽실몽실 떠오르던 나는, 문득 같이 여행했던 A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어떤 게 떠오르는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가 나와 비슷한 장면을 떠올렸으면, 하면서.


2년 전, 나의 절친이자 여행 메이트인 A가 내가 머물던 런던으로 왔던 늦가을. 우리는 런던에서 더블린을 거쳐 파리를 가는 여행을 계획했다. 계획을 짜다 보니 더블린에 머물 수 있는 날짜는 지극히 짧았지만 우리는 꼭 그곳에 가야만 했다. 그 이유는 바로바로, 기네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와 A는 같이 유럽여행을 가자고 얘기했을 때부터 '아일랜드'를 꼭 언급했다. 본 고장에서 마시는 기네스가 편의점에서 파는 캔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에 꽂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영국과 아주 가까운 나라니까 기왕 영국에 가면 기네스 마시러 잠시 아일랜드에 들르자고, 우리는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리고 그 너스레가 현실이 되었던 바로 2년 전 늦가을. 입국심사 때부터 이런 대화로 우리의 더블린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 왔니?"

"응. 여행 왔어!"

"기네스 마실 거지?"

"그거 마시러 온 거야!"


목적에 걸맞은 여행(?) 답게 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자주 기네스를 마셨다. 떠나는 날, 공항에서 비행기 보딩 하기 직전까지. 더블린에서 기네스를 처음 마셨던 그때, 정말 누군가의 말처럼 편의점 캔맥주와는 차원이 다른 거품을 맛보고 나와 A는 눈이 동그레 졌고 금세 한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만큼 맛있던 기네스였지만 나와 A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었던 건 따로 있었다.  







2.


"글쎄. 나는 그냥 그 사람들의 친절함이 떠올라."

"오 그렇지? 나도. 나는 특히 그 식당 웨이터랑 우리 사진 찍어주시던 분 생각나더라."

"나도 나도."


더블린 여행을 지금도 떠올려보면 맛있게 마시던 기네스를 포함해, 열심히 여행을 했던 그 하루가 기억이 난다. 가을색이 짙게 물든 더블린의 거리. 잠시 들렀던 디즈니 스토어. 유명한 어느 학교. 기네스 공장. 돈 아낀다고 들어갔던 맥도널드. 라이브 뮤직과 사람들로 북적였던 유명한 바.


그러나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다름이 아닌 '우리가 마주친 사람들'이었다. 그 도시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인상은 바로 '소박한 따뜻함'이었는데 그건 모두 스쳐 지나갔던 몇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3명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각각 신기루남, 순수남, 그리고 쿨녀라고 별명을 붙이고 웃곤 했다.  





3.


# 횡단보도 신기루남


더블린에 도착한 날,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해 숙소 근처에 도착했던 우리는 각자 무거운 짐(나는 배낭, A는 캐리어) 때문에 조금 지친 상태였다. 그것보다 배가 너무 고프니 우리는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숙소로 들어가자고 상의를 했고, 식당을 찾기로 했다. 마침 건너편 쪽에 식당 하나가 바로 보였고, 다른 곳이 있나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짐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 없던 우리는 체념하고 그 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 저 코 앞을, 나는 무거운 배낭 때문에 허리를 푹 숙이고, A는 잘 안 끌리는 캐리어를 끌어가며 가고 있던 그때. 우리 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 때문이었다. 그가 갑자기 가던 길을 가다 말고 내 친구의 캐리어를 확 낚아챈 것이다. 순간 나와 A는 그 남자가 캐리어를 훔쳐가는 줄 알고 놀랐지만 다행히 그냥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는 단번에 길 건너편까지 캐리어를 끌어다 준 후, 우리에게 무엇을 찾냐고 물었고, 밥 먹을 곳을 찾는다니까 여기저기를 알려주었다. 꽤 친절하게. 그러고는 우리가 잠시 황당하여있는 틈 사이에 홀연히 사라졌다. 작은 택배 상자를 들고 갔는데. 택배원일까? 잘 모르겠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도 않은 채, 그는 후다닥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신기루 아니야?"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나 봐. 근데 친절하다."


우리는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를 '신기루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웃었다. 그리고 길을 건너다 마주친 친절함에 왠지 기분이 좋던 우리였다. 더블린 느낌 좋은데?  




# 레스토랑 순수남


우리는 기분이 좋아진 채로 건너편 그 레스토랑으로 바로 들어갔다. 구석진 곳에 짐을 놓은 뒤 자리에 앉은, 배고픈 한국인 여자 두 명은 얼른 메뉴판을 집어 들고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라자냐, 버거, 아 콜라 시켜야지 콜라. 몸이 너무 고단할 때는 왜 이렇게 탄산이 당기는 건지. 속이 뚫리면서 꼭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야 그치. 이런 대화를 나누며 재빠르게 메뉴를 결정했다. 바로 주문을 하려고 두리번거리니 남자 직원이 바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라자냐랑 버거 주세요. 그리고 Coke(콜라) 두 잔 주세요."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주문을 했고, 분명 이상할 게 하나도 없던 것 같은데 갑자기 그 남자 직원이 당황을 하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이 coke는 그렇게 발음하면 안 되고... 이렇게 발음해야 돼..."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설명하고는 금세 키친으로 갔고 우리는 잠시 의아했다. 뭐지? 우리 뭘 실수한 거지? 도대체 어떤 발음이길래 그러는 거지? 그리고 바로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더니 아뿔싸, 이 단어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당황한 그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Cock.

 (뜻은 검색해보시길... 수탉 말고 다른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Coke(콜라)가 아니라 Cock라고 발음을 했던 거다. 이 코크나 저 코크나 한국어로 발음하면 똑같은데 미묘한 발음 차이가 이렇게 사람을 민망하게 할 수도 있구나. 우리는 풉 하고 웃으며 그 남자를 '순수남'이라고 불렀다.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설명하던 그 모습이 무언가 순수하고 귀여워서.


"아니 근데 친절하다. 런던에서도 나 맨날 이렇게 발음했는데? 그냥 콜라겠거니 하고 들었나 봐. 이렇게 알려준 사람 한 명도 없었어."



뭐야, 이 도시. 왜 귀엽고 순수해? 더블린 뭐야, 취향저격인데?    




# 쿨녀


배를 채우고 기운이 좀 나기 시작한 우리는 다시 각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숙소로 갈 준비를 했다. 나는 배낭을 매야하니 뻐근한 목과 어깨를 돌렸고, A는 그 무겁디 무거운 캐리어를 끌어야 하니 손목을 돌려가며. 그 모습은 매번 우스꽝스러웠다.


다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숙소로 걸어가던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느린 두 여행자는 역시나 더블린의 어느 가정집들이 즐비한 좁은 거리마저도 재빠르게 지나갈 리가 없는 법이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각 집마다 색깔을 다르게 칠해둔 문, 갑자기 올려다보는 하늘, 그 거리에서 느껴지는 찬 공기. 하나같이 다 새로운 풍경이어서 우리는 마치 밥을 꼭꼭 씹어먹듯, 걸음을 더 늦춰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각자의 시선에서 멈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분명 우리는 '각자'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갑자기 또 어떤 사람이 등장하였고, 이번엔 키가 큰 여자였다. 그녀는 또각또각 재빨리 가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네 사진 찍어줄까?"


그녀의 눈엔 여행자인 우리가 둘만의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같이 사진 찍을 생각이 없었지만, 거절을 하기도 이상해서 우리는 고맙다고 한 후, 핸드폰을 건넸다. 그녀는 정말 쿨하게 사진 한 두장을 찰칵 찍어주더니 바로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시원시원하게 걸어가던 뒷모습이 어찌나 쿨해 보이던 지.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그녀를 '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둘이 같이 찍힌 사진이 생겨 고마웠다.



"아니 언니, 왠지 여기 사람들은 다 친절할 것만 같아."

"나 아무래도 여기서 살아야겠다. 런던보다 훨씬 다정한 거 같아."






신기루남. 순수남. 그리고 쿨녀.


숙소까지 걸어가며 만난 이 사람들 덕분에 더블린에 대한 마음이 활짝 열린 우리였다. 그리고 그 첫인상답게 우리가 여행했던 더블린은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에게만큼은 따뜻하고 소박했다. 다행이었다. 잠깐 머물었던 그 도시가 좋게 기억되어서 그래서 나와 A가 기꺼이 아일랜드를 다시 들르고 싶어서.  


아, 그때의 가을, 그 늦가을의 더블린, 그 따뜻한 느낌.


기타 음이 딩딩딩하고 울리면서 "북 오브 러브-" 하고 시작되는 멜로디는 언제나 나를 그때의 더블린으로 데려간다. 그 가을의 짧은 여행과 친절했던 사람들 그리고 즐거웠던 우리들. 더블린 이야기가 나올 때면 A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더블린 또 가고 싶다."

  



-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The book of Love>의 3가지 버전을 좋아해서 3곡을 모두 추천하고 싶다.


<The book of Love> by Justin Timberlake.

<Il Livro Dell 'Amore> by 2 Cellos.

(이 이탈리어로 된 곡이 원곡인데 투첼로스 버전은 연주 영상을 꼭 보시길! 너무 감미롭고 낭만적이다.)

<Il Livro Dell 'Amore> by 포르테 디 콰트로.


만연한 가을에 커피 한잔 마시며 들으신다면, 아마 계절이 더 풍성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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