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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Nov 11. 2020

아빠는 항상 그런 식이었어

아무렇지 않은 큰딸과 당황하는 아버지


1.


10년 만에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요즘, 나는 그들과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다. 특히 나의 부모님과. 가족은 참 이상하다. 떨어져 있을 땐 보고 싶고 애틋하더니 막상 붙어있으니 빨리 떨어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영국 갔다 오더니 애가 이상해졌다, 고 하던데 정말 내가 이상해진 걸까? 난 아닌 거 같은데. 이런 게 뭐 세대 간의 갈등 이런 건가? 그럼 왜 그 전에는 이런 마찰이 없었지?


아 내가 말을 안 했지. 그러니까 내가 그냥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나의 의견을 말할 때면 어디서 부모한테 말대꾸를 하냐 혹은 어디서 버릇없게 행동하냐는 말을 들었고 나는 내 입을 닫기로 결정했다. 내가 정말 버릇이 없던 경우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 의견을, 그냥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부족했달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그냥 안 하고 말지. 그래서 말하기를 단념했다.


그러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참고 내가 그냥 넘기면 된다는 태도는 타인이 나의 경계선을 넘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로 변질되었고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야 나는 지난날의 태도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주 단단히 구기고 구겨서 확 던져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을 마음에 새겼다.



어떤 관계이건 선은 분명히 지켜져야 하고 서로가 존중받아야 한다. 불편하다면 말을 하자.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담긴 다정한 말을 건네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2.


여하튼 나는 그만큼 달라졌고, 영국 갔다 오더니 이상해진(?) 그 딸내미와 달라질 것 없는 부모님의 갈등은 굉장히 사소해서 눈치채기 어려운,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상 속 대화에서도 나타났다.



“저기 선풍기 코드 좀 꽂아봐.”


아버지는 선풍기 코드를 꽂으라고 하셨고 나는 코드를 찾으며 조금 허둥댔다. 그러자 성질 급한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휴 이것도 제대로 못하냐.”


분명히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익숙한 문장이었는데 나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실수할 수도 있지. 왜 사람이 모든 걸 다 완벽하게 잘해야 돼?”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싸우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것. 말투와 표정을 적절히 섞어서 지혜롭게. 능청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선풍기 코드를 연결하는 나를 바라보며 아빠는 몹시 당황스러워했고 아무 말도 이어 붙이지 못하셨다. 분명 그의 잔잔하던 호수에 내가 돌을 던져 파동이 일어난 거였으리라. 죄송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그 말을 튕겨야 했고 그 튕김이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전에는 설거지를 하면서 잠시 외국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틀어놨다. 영어가 어쩌고 저쩌고 들리니 옆에서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물으셨다.


“너 이제 영어 들으면 다 해석이 가능하냐?”

“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는 해석이 되지.”


그는 역시나 이렇게 답했다.  


“해석이 다 돼야 하는 거 아니냐? 2년을 나갔다 왔는데.”


역시 이 문장도 예전부터 들었던 익숙한 문장이었다. 분명 예전엔 기분이 나빴는데 나는 또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튕겼다. 마치 날아오는 탁구공을 다시 탁, 하고 쳐서 상대방에게 보내듯.


“아빠는 항상 이랬어~ 어떻게 칭찬 한 번을 안 해주냐. 그게 한 번에 짜잔 하고 되는 일이 아니야 아빠. 에휴~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듣고 살았지~”


여기서 포인트는 아까도 말했듯이 '능청스럽게, 싸우려는 의도가 아님이 드러나도록'이다. 그는 나의 말을 듣더니 멋쩍어하시며 연이어 말씀하셨다.


“아빠가 잘 몰라서 그러지. 아니 더 잘해야지~ 너도 얼른 어쩌고 저쩌고.....”


그 후의 말은 일부러 듣지 않았다. 어쩔 땐 튕겨낼 필요도 없는 말들이 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그런 말의 소리는 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차단해버린다.




3.


천성이 감성적이고 예민한 나는 그 어느 것보다 칭찬과 사랑이 가득 담긴 말, 혹은 위로와 응원이 가장 많이 필요했다. 다들 그러는 줄 알았는데 유난히 내 내면에 있는 그릇이, 따스한 말을 담아야 할 그 그릇의 크기가 좀 크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리고 그 그릇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통해 최대한 채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도.


그런데 뭐 어떡하겠어. 과거는 지나갔고 나는 이만큼 자라났는 걸. 지금의 나는, 나의 부모가 되어 유년시절의 나를 양육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늘 공허했던 그 그릇이 가장 다정하고 따스한 말(내가 나에게 하는 말)로 메꿔지도록. 그리고 나의 진짜 부모님이 내게 여전한 방식(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지라도, 그럴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나의 부모님에게 원하는 모습은 이 모습이었다. 선풍기 코드를 꽂는 걸 허둥지둥 댈 지라도 그냥 웃으며 넘어가는 모습. 그리고 나를 듬뿍 (과장해서) 칭찬해주고 다정하게 표현해주는 모습.



"와! 우리 큰 딸이 이만큼이나 한 거야? 장난 아니다. 너무 멋있어!! 역시 우리 큰딸은 아빠(엄마) 딸이지. 뭘 해도 잘 될 거야. 넌 그럴 수밖에 없어!!!"



나는 나의 부모로부터 이만큼, 내가 원하는 만큼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나 자신,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장땡이야, 내 내면 그릇이 조금 더 채워지는 거야.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해. 이건 뭐 별 것도 아니다!'

혹은,

'와.. 너 이만큼이나 한 거? 장난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됨. 존멋.'




4.


다행히도 이 불편한 부대낌은 부모님도 조금 익숙해지신 것 같다. 영국 갔다 오더니 이상해졌다는 말이 큰 딸이 달라졌다는 말로 바뀐 걸 보면. 그래도 여전히 일상의 크고 작은 순간에 당신들과 부딪힐 때면 나는 나를 지켜야 하고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독립의 과정 인가 싶다. 나의 중심을 붙잡고 잘 지내야만 부모 품을 떠나도 잘 살 수 있겠지.


경계선. 나를 지키기. 그리고 독립.



나는 그렇게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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