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여행을 마치며

풀지 않던 짐들을 풀고, 버리지 못한 낡은 것들을 버렸다.

by 아름나무


한국으로 돌아왔던 올해 봄.



2주간의 자가 격리를 한 후 처음 마신 아이스 라테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건 격리를 하는 동안 핸드 드립으로만 커피를 내려 마신 탓이었다. 록다운으로 유령도시 같았던 런던과는 전혀 다른 고국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몇 달만의 외식, 삼삼오오 모여 앉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한국어, 1층 버스, 모든 것이. 무척 보고 싶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리웠던 나의 도시 서울을 볼 생각에 몹시도 설레었는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반가움도 잠시 나는 나 자신도 낯설 만큼 적응이 느렸다. 다시 돌아온 한국, 친구들, 오랜만에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고향과 본가의 품이 마냥 포근할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까끌거렸다. 그래서 한동안 짐을 풀지 않았고 잠을 설쳤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여행으로라도 다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나를 움직이지 않게 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몰입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를 했다. 이렇다 할 결과물은 없지만 이것저것 배우고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나 혼자 이곳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고 그것은 쉽게 털어놓지 못할 감정들이었다. 나조차도 어쩌지 못하던 그 감정들이 날 괴롭힐 때면 나는 이따금씩 외로웠다. 여전히 짐은 그대로 풀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몇 달이 지나고 그 사이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연둣빛 잎사귀에 기나긴 비가 후드득 내리고 마침내 노랗게 바뀌는 이 계절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변함없이 나의 런던 생활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였고 나는 매일 쓰기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시간은 자꾸만 거슬러 올라갔고 묻어 놓았던 이야기가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다만 내가 한 가지 다짐했던 건, 이 글에서만큼은 더 용기를 내보고 솔직해져 보자, 이것뿐이었다. 그때부터 쓰고 또 썼다. 휴학 이야기, 간이식 이야기, 그리고 런던 이야기까지.


글을 쓰면서 몰입했다. 나의 시간들이 정리가 되었고, 나는 때때로 내 글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쓰면 쓸수록 나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것은 내 내면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고, 모두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쳐다보지 않던 짐들을 풀었고 정리했다. 어느새 겨울옷이 가득 들어있는 박스 한 개만 남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보슬비에 붉게 짙어진 잎들이 바닥에 떨어진 걸 보니 다시 한번 계절이 바뀌려나보다. 나는 아직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곳에서 홀로 적응 중이지만 이상하게 외롭지가 않다. 그것은 비로소 나 자신, 그리고 글과 함께 나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간다는 반증이리라. 여전히 꿈속에서 런던을 가고, 그곳에서 나는 '아 너무 그리웠어!'라고 종종 말한다. 하지만 그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운을 더 내본다. 지금은 그곳에서 배운 것들을 써먹을 때니까. 무엇보다도 나의 지금이 소중하니까.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을 여유로움.

부딪히고 넘어져보는 시도.

다시 일어나서 또 나아가 보는 용기.

나답게 사는 아름다운 몸짓.

일상의 소중함.

내 삶은 영화, 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


이 이야기를 쓰며, 런던에서 얻은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보았다. 빈 페이지에 타자를 쳐서 새겨넣듯 탁, 탁, 탁.


글을 마치고 나니 아무래도 내 내면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그래서 몹시 기쁘다. 바라건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미흡한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 자신, 그 안으로 즐겁고도 뜨거운 여행을 하길, 그래서 더 용기를 내보길.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써야지.



아, 그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박스 한 개를 풀어 겨울옷들을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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