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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Dec 09. 2019

요절

꿈꾸었지만 가질 수는 없었던 것





무언가를 이룬 거 없이 일찍 죽어봤자 시체가 될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시체도 될 수 없다. 다른 곳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나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없다.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얹혀 사는 삶. 나만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 온전히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시간이 다 당신을 위한 것 같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내 모든 시간을 당신에게 갚아 나가는 것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속에서 지낸다. 실제로 갚으려 했지만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낭비 같다.


천재들은 요절한다던데. 나는 천재도 아니었으니 요절할 수도 없나보다.


일찍 죽으면 무언가 달라질까. 우선 나의 당신이 가장 많이 슬퍼할 것이다. 당신의 삶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삶이 망가지기를 바란다. 양가감정 속에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 언젠가는 묻고 싶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거야? 그 말 한 마디만으로 나는 죽음을 암시하게 된다. 죽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이후의 계획을 알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놓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금기를 입에 올리면 일관된 반응으로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라든지. 자해라든지. 자살시도라든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거야?


조악한 말로 빚어낸 삶이 초라하다.


어떤 문장은 영원히 남아 빛이 나고 어떤 문장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기억되는데 나의 문장들은 어떨까. 누군가 나의 문장을 인용한다면 분명 슬픈 사람일 것이다. 슬픈 사람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기력이 없다. 우울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이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기에 타인을 위해서는 시간을 낼 여지가 없다. 내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낼 수가 없다. 나를 위로하기에도 바쁜 삶이라서.


한때는 취미를 가져 보려고 했다.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고 글씨를 새겨 넣었다. 악기를 연주해보려 했다. 피아노 건반을 둥당거리면서 음악을 만들어냈다.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찾아 읽으면서 좋은 문구들, 마음에 남는 문구들을 필사했다. 사소한 취미들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조각난 나를 하나씩 하나씩 우울이라는 강에 흘려보냈다. 멀리까지 갔을까. 지금은 그것들을 다시 찾으러 갈 기력이 없다. 강의 하류에는 내가 버린 것들이, 잃어버린 것들이 가득 쌓여 있을 것이다. 그 모래톱 사이로 서벅서벅 걸어 들어가면 피아노가 있고 다이어리가 있고 일기장이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문장들이 그 사이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발목까지 잠긴 채로 그것들을 바라볼 것이다. 다시 주워 오기에는 내 공간이 너무나 작고 좁다. 내 마음이 너무나 얄팍하다.


작은 취미조차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문득 공허해지는 삶을 보내고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을 때.


그럴 때마다 글을 썼다. 세상을 원망하고 나를 미워했다. 낳아 주신 부모님을 향해 편지를 썼다. 나를 못살게 군 사람들을 저주했다. 내 인생을 망친 나를 증오하고 몇 번이나 종이 위에서 죽였다. 잉크가 피처럼 번졌다. 번지는 글씨들은 내 망가진 삶의 조각이었다. 조각난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불에 태웠다. 번지는 연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죽을 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을 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게 나를 괴롭게 했다. 죽어버렸으면, 편했을까.


일찍 죽지 못한 삶은 무엇을 가지게 되는가.


죽지 못해서 연장된 삶을 사는 기분이 들 때면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과거의 내가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문장들을, 조악한 문장들을 하나 하나 읽어보았다. 일기장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너절했다. 어디 내놓을 수 없는 문장들이 쓰여 있었다. 읽고 있으면 부끄러웠고, 수치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이게 나였다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괴로웠던 나를 마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스스로를 동정하게 했다. 일기의 순기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과거의 나를 마주하면서 동정과 불안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이러고도 꾸역꾸역 살아 있구나. 나의 감상이었다. 나의 삶에 대해 감상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살고도 꾸역꾸역 살고 있구나. 누군가에게 빚을 져 가면서 누군가에게 얹혀 가면서 살아 있구나. 왜 살아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 더욱 우울해지고 더욱 외로워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천재가 아닌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 모든 것이 결국 다 지나간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요절하지 못한 시간이란. 한참만에 눈을 뜨고 나서는 나는 아. 살아버렸다. 라고 생각했다. 살아버렸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문제였다. 태어나버렸다. 존재해버렸다. 살아버렸다. 살기를 바란 적 한 번 없었는데, 살아버렸다.


그 때 죽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 이후로 그 어떤 유의미한 일을 한 게 없는 것 같다. 그 때 죽었어도 괜찮았을텐데.


그러나 당신은 슬퍼하겠지. 당신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당신에게 짐만 되는 것 같다. 당신 때문에 사는데, 당신을 해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삶에 나는 필요치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의 물혹 같은 존재 같다. 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필히 받아야 할 것이다, 당신은.


의사는 말한다. 악성 종양은 아니지만, 살기에 불편하다면 제거하셔야죠.

나는 말한다. 악당은 아니지만 삶에 도움이 안 된다면 나를 죽이세요.


나쁘지 않은 게 다 무어야. 나쁘지 않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건 나쁜 삶이야. 당신은 정말 내가 살아 있기를 바라?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 있기를 바라? 나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다 지나가고 나서 행복했어, 괜찮았어, 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게 정말 지나가기는 지나가는 걸까? 이게 내 삶의 전부는 아닐까? 내 삶의 밑바닥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밑색이 아닐까? 그 위를 어떤 색으로 덧씌우려 해도 보기 싫은 탁빛이 될 뿐, 맑아지지는 않을 것 같아. 밑그림이 잘못된 건 아닌데, 스케치를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알겠지. 그런데 나에게 알려주진 않겠지. 나는 평생을 모르고 살겠지. 돌이켜 생각하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순간이 올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데. 오늘도 밤이 오고 나는 이 밤에 또 무언가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죄다 흐리고 흑백이고 어둡고 침침하고…….


당신 글을 읽었어요. 나는 수치심에 마음이 뛴다.


내 글을 읽었나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어땠나요.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해요.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 글을 쓰고 싶어요……. 누군가를 괴롭히는 글이 될 수도 있는 글을. 쓰려 해요. 누군가는 괴롭고 누군가는 부끄럽고 누군가는 울겠죠.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죽기 전에. 요절하기 전에.


노래 가사는 스물 여덟살까지만 살아달라고 했다. 숫자를 거꾸로 세어 나가기 시작할까. 그럼 스물 여덟이 올까. 그 때 나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을까. 그 때가 되어서 비로소 놓아버릴 수 있을까. 스물 여덟. 얼마 남지 않은 숫자를 헤아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나는 카운트 다운한다. 10.


천재들은 요절한대. 요절하지 않은 천재는 무엇을 남겼지? 짙고 지저분한 오명 따위를 남기고 문란한 스캔들을 퍼뜨렸지. 화려한 삶이었을까?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을까? 9.


8.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7.


오늘은 하루종일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자고 또 자고 또 자다가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어. 간신히 바깥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모든 것이… 처참했는지. 6. 5. 4. 끝나가는 숫자들을 보면서 한 걸음 걷는 속도가 느려졌을 것 같아 빨라졌을 것 같아? 모든 것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기분이야. 유쾌해? 곧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유쾌해.


엄마. 내가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3.


나는 엄마보다 일찍 죽고 싶은데.


2.


올해가 한 달 남았더라. 사랑해, 엄마. 내년에도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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