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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Jan 12. 2021

나만큼 널 사랑해 줄 인간은

어쩐지 요미가 나를 키워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요미는 집에 온 날부터 4일간 박스 안에서 지냈다. 컴퓨터를 담았을 법한 박스였다. 크기가 아주 커서 요미가 더더욱 작아보였다. 당시 나는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동네 동물 병원에 물어가며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샀다. 건사료와 습식 캔사료, 화장실과 그 안을 채울 모래, 물그릇, 장난감…. 집에 온 다음날까지 요미는 먹고 자기만을 반복했다. 3일째 될 무렵 작은 소리로 야옹야옹 우는 걸 처음 들었다. 여전히 두 손바닥 위에 담을 수 있을 만큼 깡마른 상태였지만, 눈에 생기가 조금 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양이는 박스 안에서 키우는 동물이 아니다. 4일째 되던 날 박스를 내다버리고 요미를 풀어뒀다. 풀어뒀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겁이 많은 요미에게 인간의 집은 너무 낯설고 무서운 곳이라, 박스 밖에 내려두자마자 쏜살같이 숨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요미는 숨어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숨어 있었냐고? 무려 3주간!!


다행히도, 그당시에 내가 혼자 살았던 집은 콩알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침대에 누우면 현관문이 보이는 원룸이였으니까. 요미가 숨을만한 곳도 고만고만했고 없다고 해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대체 언제쯤 요미의 얼굴을 볼 수 있는지, 혹시 영영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닐지 불안했다.


요미는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내가 출근하거나 외출하면 나와서 밥을 먹고 화장실을 사용했다. 줄어드는 밥그릇과 화장실을 사용한 흔적으로만 요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종종 늦은 밤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긴 했다. 일어나 불을 켜면 후다닥 숨는 요미의 기척. 오도독 오도독 밥먹는 소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잠결에 듣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기간을 거치고 나니 거짓말처럼 요미와 가까워졌다. 그런 문장을 쓰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3주가 지난 후 요미는 조금씩 모습을 비추긴 했다. 1 가능한 자기 몸을 숨긴 상태에서 2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에서. 귀엽게도 내가 궁금하긴 했는지, 책장과 책 사이에 끼어서 나를 쳐다보고 있거나 물건 뒤에 몸을 숨기고(안 숨겨짐) 나를 훔쳐봤다.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해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 요미는 멀찍이서 나를 바라본다. 어릴 때는 나를 지켜보기 좋은 장소를 고른 후 앉거나 누워서 몇시간이고 나를 보고 있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술을 마시다가, 고개를 돌리면 마주치는 요미의 눈. 아주 오랫동안 그 눈빛에 위로를 받았다. 밥도 내가 주고 화장실도 내가 치워주는데, 어쩐지 요미가 나를 키워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를 지켜보다가도 금방 잠을 청하러 사라진다. 그게 가끔은 아쉽지만 이제는 내가 요미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사실 처음에 요미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는 건강하게 만들어서 입양보내겠다는 생각이었다. 고양이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하는데다 생활습관까지 불성실한 내가 요미를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한달이 넘어도 나와 내 집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애를 어디로 보내겠는가. 한창 발치에서 뒹굴다가도 내가 옷만 갈아입으면 하악질을 하고 경계하는데! 고릉고릉 거리는가 싶다가도 내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기만 해도 후다닥 숨어버리는데! 


요미가 온 지 며칠만에 내 집의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내 무릎에 대자로 누워서 잠들었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미는 평생 인간을 겁내면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고양이를 누군가에게 사랑해달라고 보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만큼 요미를 사랑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그런 마음을 변명삼아 요미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요미는 날이 갈수록 살이 붙어 ‘건강한 고양이’가 됐지만 나는 차일피일 입양 보내는 것을 미뤘다. 점점 고양이다워지는 요미는 활동량도 장난도 늘어갔다. 종이 상자를 물어뜯고 그 속에 들어가 노는가 하면, 비닐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돌아다녀서 나를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감 때문에 일찍 출근했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 반복될 때면 집에 있는 요미가 보고 싶어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양이는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구나. 그걸 몇번이나 되새기게 되는 날들이 계속 됐다. 그 사랑스러움에 명확히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유부단한 나의 마음이 곧 요미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다줄지 상상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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